인용문
따라서 어느 날 대규모 전시 큐레이터가 당신에게 전시물로 벽돌을 부탁한다고 해서 놀라거나 특별히 자랑스러워 할 이유는 별로 없습니다. 그 전시가 타이포잔치라면 더더욱.

버려진 책을 모읍니다. 일상생활에서 버려진 책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미성숙한 저술이나 무성의한 편집, 어떤 방식으로든 내용과 조응하지 않는 디자인, 권태 등의 이유로 읽히지 않거나 않을 책은 뜨거운 식기 받침이나 살충 도구 등으로 본디 기능을 잃어 언제든 버려질 수 있으며, 지금 당신이 읽는 이 안내서 한 장 역시 그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재단법인 출판도시문화재단에서 운영하는 파주출판문화정보산업단지(일명 ‘파주출판도시’) 역시 버려진 책을 찾기 적절한 곳입니다. 파주출판도시에서는 한 해 평균 약 450만 권의 책이 만들어지며, 동시에 그에 맞먹는 수의 책이 오타나 제작 불량, 판매 부진, 저작권법 위반 등의 이유로 버려집니다.

당신이 승용차가 없다면, 출퇴근 시각에 파주출판도시행 2200번 버스에 타지 않도록 주의합니다. 시각별 승차 인원수를 헤아리지 않은 배차 간격으로, 얼굴이 파란 기획자나 편집자, 디자이너 등을 포함해 파주출판도시 근처 명품 아울렛을 방문하는 중국인 관광객 틈에서 짧게는 30분에서 길게는 한 시간 이상 서 있을 수 있습니다.

‘참다운 책 문화’와 ‘인간성 회복을 위한 도시’를 지향하는 파주출판도시에서 당신은 어렵지 않게 버려진 책을 찾을 수 있을 뿐 아니라 책이 ‘책’이 아닌 ‘(자리만 차지하는, 종이 낱장을 조합한) 물건’이 된 상황을 경험할 기회까지 얻을 수 있습니다.

재단기나 작두, 칼, 손 등으로 책에서 책등을 없앤 뒤 낱장으로 나눕니다. 일본에서 편집한 책이라면, 먼저 장갑을 착용한 뒤 “이제 책등을 제거하겠습니다.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今、背表紙を除去します。それでは、どうぞよろしく。)” 하고 말하며 다른 책을 대할 때보다 의식적으로 예의를 갖춥니다. 책 낱장에서 표지를 포함해 코팅한 부분과 책등 쪽에 남아 있을지 모를 접착제는 반죽에서 물에 녹지 않으므로 한 장 한 장 확인해 없앱니다.

당신이 ‘가만⋯ 그런데 내가 왜 지금 책으로 벽돌을 만들고 있지?’ 하는 생각이 문득 든다면, 책 낱장을 파지 전문 수거 업체에 판매할 수 있습니다. 판매 금액은 킬로그램당 100원이 채 되지 않습니다. 파지 전문 수거 업체에서 거둔 책 낱장은 주로 한글을 읽을 수 없는 제3세계 출신 전문가가 파쇄하고 재생지로 바꿔 (언젠가 다시 버려질 수 있는) 책을 만드는 데 사용합니다.

책 낱장을 문서 세단기나 두 손으로 분쇄하고, 짧게는 한 시간에서 길게는 세 시간 동안 물에 불린 뒤 믹서로 다시 분쇄합니다. 책 낱장과 물의 비율은 무게를 기준으로 1 대 6을 추천합니다. 믹서를 이용한 뒤 갈증이 난다고 해서 바로 토마토나 당근을 갈아 주스로 만들어 마시지 않도록 주의합니다. 믹서가 없다면, 전동 드릴 끝에 믹서 날을 달아 이용할 수 있습니다. 언제나 자기 성능 이상을 발휘하는 디월트(DEWALT)의 제품을 추천합니다. 책 낱장은 분쇄하면 분쇄할수록 반죽에서 서로 뭉치지 않습니다. 당신이 평소에 책에 느꼈던 분노나 스트레스를 이 단계에서 해소하시기 바랍니다.

반죽을 이루는 기본 재료는 다음과 같습니다.

분쇄한 책 낱장 가운데 문학서 비중이 높으면 문학적 벽돌을, 학술서 비중이 높으면 학술적 벽돌을, 실용서 비중이 높으면 실용적 벽돌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대학원생이 대필한 일부 교수의 연구 실적 날조용 단행본이나 국정교과서 비중이 높으면, 자칫 쓸모없는 벽돌이 될 수 있으므로 주의합니다.

모래는 바닷모래를 추천합니다. 흙이 많은 강모래는 시멘트와 잘 섞이지 않으므로 사용하지 않습니다. 방충제 역할을 하는 붕사 대신 생석회나 은행잎 달인 물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생석회는 물과 만나면 열을 내므로 장갑을 착용한 뒤 사용합니다.

기본 재료의 비율을 달리하거나, 양귀비나 반려동물 사료, 헤어진 연인이 쓴 연애편지, 특정 이유로 마음에 들지 않는 포스터, 부적, 톱밥 등을 분쇄해 사용하면, 당신이 원하는 벽돌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벽돌 제작용 압착기나 종이 장작 제작기, 원하는 모양의 틀 등에 반죽을 넣은 뒤 위에서 아래로 눌러 물기를 없앱니다. 원하는 모양의 틀을 만들기 어려우면, 바닥에 물기가 빠질 구멍을 뚫은 통조림 캔을 이용할 수 있습니다. 반죽에서 물기를 없애면 없앨수록 말리는 시간을 줄일 수 있으며, (일반 벽돌만큼은 아니지만) 단단한 벽돌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물기를 없앤 반죽이 부서지지 않도록 꺼낸 뒤 바람이 잘 통하는 곳에서 약 2주 동안 말립니다. 고추 전용 건조기나 모텔 온돌 객실 등 말리는 환경을 인위적으로 만들면, 짧게는 사흘까지 말리는 시간을 줄일 수 있습니다. 말리는 시간 동안 반죽 주위에서 블루스나 판소리, 유럽에서 책 디자인으로 수상한 책 등을 감상하지 않도록 주의합니다. 2주가 훨씬 지난 뒤에도 물기가 사라지지 않아 반죽이 축축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매일 길고 딱딱한 물건으로 반죽을 눌러 마른 상태를 확인하는 것은 반죽에 실례일 수 있습니다.

이제 당신은 책으로 가볍고, (일반 벽돌만큼은 아니지만) 단단하며, 이야깃거리까지 모자람 없는 벽돌을 만들 수 있습니다. 당신은 벽돌을 벽돌 본디 기능인 공간을 구성하는 데뿐 아니라 모닥불 발화제나 플리마켓 판매 제품, 명절 선물 등으로 이용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어느 날 대규모 전시 큐레이터가 당신에게 전시물로 벽돌을 부탁한다고 해서 놀라거나 특별히 자랑스러워 할 이유는 별로 없습니다. 그 전시가 타이포잔치 2015라면 더더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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