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결코 저것이 아니다
2010년 서울에서 론칭한 패션 브랜드 thisisneverthat은 자신들이 추구하는 디자인에 관한 명제—“이것은 결코 저것이 아니다.”—를 브랜드명 삼아 1990년대 문화와 오늘날의 트렌드를 혼합해 시즌마다 새로운 컬렉션을 발표하는 한편, 다양한 브랜드, 뮤지션 등과 협업해왔다. 론칭 이후 몇몇 크고 작은 사건과 함께 10년이 흘렀고, 그 사이 브랜드는 한국 패션계에서 하나의 ‘현상(phenomenon)’으로 불릴 만큼 수많은 추종자를 만들어냈다. 이 책 (그리고 웹사이트) 『thisisneverthisisneverthat』은 thisisneverthat이 활동한 10년을 정리한 결과물이자 그래픽 디자인 스튜디오 겸 출판사 워크룸과의 협업물이다. 특히 1년이라는 작업 기간을 포함해 10년에 걸친 방대한 자료를 1,000쪽 분량의 인쇄물뿐 아니라 웹사이트에까지 담아낸 일은 (한국) 스트리트 패션뿐 아니라 패션 전체를 훑어도 좀처럼 보기 드문 시도다.
이것: 확장된 목록
thisisneverthat의 2015년 봄여름 시즌의 시작은 어느 날 한 전시에서 관람한 사진 한 장이었다. 강물 위에서 불이 타오르는 뜻밖의 모습은 영문 한 구절—“Lake on Fire”—로 수렴하고, 제품은 이 구절을 둘러싼다. 책의 앞표지를 장식한 것은 두 가지 스티커 너머로 해당 시즌 제품을 착용한 모델의 흑백으로 처리된 상반신 사진이다. 난데없이 강물 위에서 타오르는 불을 마주한 사람처럼 어떤 사건이 일어났음을 감지했지만, 사건은 결국 자신과는 무관하다는 듯한 표정이다.
무언가를 정리하는 실용적인 방법은 목록화다. 물론 여기에는 정보를 추상화하는 지난한 과정이 필요하다. 책의 파라텍스트(Paratexte)를 지나면 독자를 가장 먼저 맞이하는 것은 지면에 빽빽하게 들어찬 목록이다. 흰색 배경에 검은색 글자, 은색 선으로 이뤄진 목록은 항목을 품고, 항목은 다시 목록을 품는다. 항목은 각각 제품, 룩북, 영상, 오프라인 매장, 사무실 등 브랜드를 둘러싼 다양한 생산물에 부여된 특정 코드(예컨대 이 책의 코드는 WR20SPT001NA고, 웹사이트의 코드는 WR20SPT002NA다. 코드는 내부자만 알 수 있는 체계로 생성됐다.)를 기준으로, 시즌 역순, 알파벳순, 가나다순에 따라 정렬된다. 목록은 책 곳곳에 특정 순서에 따라 무심하게 자리하지만, 목록과 목록이 품은 4,000여 가지 항목은 그 자체로 브랜드의 역사를 깔끔하고 선명하게 드러낸다. 하지만 항목은 그저 편안하게 목록 속 항목으로만 머무르지 않는다. 항목은 목록 앞뒤에서 다시 시즌별로 묶이고, 항목을 이루는 정보는 중요도에 기반을 둔 특정 규칙에 따라 추억을 편집한 각종 이미지로, 또 다른 형식을 띤 목록으로 확장한다. 목록으로 시작하는 이 책은 요컨대 확장된 목록이다.
목록은…
추억을 편집한 각종 이미지로, 또 다른 형식을 띤 목록으로 확장한다.
한편, 목록은 책을 벗어나 독립된 웹사이트( http://thisisneverthisisneverthat.com )로서 월드 와이드 웹(World Wide Web, 웹)에서도 자리 잡았다. 책과 달리 목록 자체에 집중하는 웹사이트 속 목록은 인쇄물 속 목록의 태생적 한계, 즉 한번 인쇄된 뒤에는 수정할 수 없다는 점을 뛰어넘어 목록뿐 아니라 목록 속 항목이 언제든 재편집될 수 있다는 가능성과 사용자가 쉽게 정보를 열람하는 데 일조해야 한다는 목록의 주된 목적을 시사한다. 참고로 이 웹사이트는 작업의 또 다른 결과물이지만, 책 이전에 작업 기간 1년 동안 그 자체로 thisisneverthat과 워크룸이 책에 실을 정보를 정리하는 온라인 작업 도구로 활용되기도 했다. 즉, 작업 과정으로만 따지면 데이터는 먼저 웹사이트를 통해 유의미한 정보가 되고, 책에서는 그 정보가 다시 활용된 셈이다.
http://thisisneverthisisneverthat.com
http://thisisneverthisisneverthat.com / 기술 지원: 민구홍 매뉴팩처링
그리고 유의미한 정보가 된 이상 어디서든 사용할 수 있는 것은 물론이다.
저것: 또 다른 목록을 생성하는 목록
“글 한 편이 글자, 단어, 구절, 문장, 문단으로 이뤄진 복합적인 목록”(민구홍, 『새로운 질서』, 미디어버스, 2019)이라면, 이 책에서 목록은 다음과 같이 또 다른 목록 세 가지를 생성한다. 즉, 목록 각각은 목록이 없었다면 존재할 수 없는 목록이다.
하나는 브랜드를 오히려 흐릿하게 만드는 목록(「이것이냐/저것이냐」)이다. 소설가 정지돈은 어느 날 워크룸으로부터 받은 주문—“‘이것’이 결코 ‘저것’이 아니게 된 국면을 고안하는 글 한 편이 필요합니다.”—에 따라 덴마크의 철학자 쇠렌 키르케고르(Søren Kierkegaard)의 저작 『이것이냐/저것이냐』(Either/Or)를 변주하며 낯선 측면에서 브랜드를 들여다본다.
다른 하나는 브랜드를 조금 더 깊숙이 파고드는 목록(「이것은 이것이 결코 저것이 아닌 것이 결코 아니다」)이다. thisisneverthat과 워크룸은 브랜드명의 유래와 브랜드 초기의 서울 황학동 시절부터 소셜 미디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홍보 전략,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포스트 코로나 시대’까지 브랜드를 둘러싼 10년과 오늘에 관한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마지막은 브랜드를 확장시키는 목록(「스트리트 패션과 유스 컬처」)이다. ‘볼거리’와 ‘입을거리’는 넘쳐나지만 좀처럼 ‘읽을거리’가 드문 한국 패션계에서 꾸준히 패션 블로그 ‘패션붑’( https://www.fashionboop.com )을 운영하며 칼럼니스트로 활동하는 박세진은 티셔츠, 스웨트셔츠, 마운틴파카, M-65 등 대표적인 스트리트 패션 아이템의 유래를 통해 스트리트 패션과 유스 컬처를 훑고, 둘의 미래를 전망한다. 그리고 이 미래는 thisisneverthat이 나아갈, 또는 일부러 빗겨설 어떤 미래다.
이것은 이것이 결코 저것이 아닌 것이 결코 아니다
티셔츠는 평평하지만 사람의 몸을 감싸는 순간 입체로 탈바꿈한다. 종이 또한 평평하지만 글자와 도판이 인쇄되고, 책으로 묶이는 순간 입체로 탈바꿈한다. 모두 평평하지만 입체를 향한 가능성을 품고 있다. 아니, 결국 입체가 될 운명이다. 공교롭게도 패션은 이번 기회에 이 책을 통해 책이 됐다. thisisneverthat에 익숙하고, 나아가 패션에 밝은 독자라면 자연스럽게 궁금증이 일 것이다. 책은 반대로 패션이 될 수 있을까? 책을 읽고, 보는 일은? 나아가 책을 만드는 일은? 이는 thisisneverthat이 워크룸과 함께 새로운 독자에게 건네는 질문이기도 하다. 다소 두껍고 묵직한 책으로 말이다. 질문에 대한 답이 무엇이든 ‘그것’은 결코 ‘이것’은 아니며 ‘저것’ 또한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