ミン・グホン・マニュファクチャリング

ワ ナ

2025

나와 나와 나와 나와 나

“저를 무엇으로 규정하는지는 그저 상대방에게 맡기고 싶습니다. 제가 생각하지 못한 직함이 튀어나오고, 그에 따라 상대방을 대하는 제 태도도 달라지는 게 재미있고요. 그렇게 저는 상대방에 따라 편집자일 뿐 아니라 작가, 선생님, 나아가 남편이나 애인이 되기도 하겠죠.”

언젠가부터 나는 크게 네 가지 시공간에 둘러싸여 있다. 하나는 집, 다른 하나는 회사, 다른 하나는 「새로운 질서」, 다른 하나는 민구홍 매뉴팩처링이다. 네 가지 시공간은 조금씩 나를 규정하고, 다시 각 시공간에 둘러싸인 나에게 조금씩 영향을 미친다. 양자역학에서 말하는 중첩 상태처럼 나는 각 시공간에 존재하는 동시에 각 시공간에서 다른 모습으로 관찰된다. 각 시공간은 단순한 물리적 장소가 아닌 서로 다른 시간성과 정체성의 장(場)이다. 그 경계를 넘나들 때마다 미세하게 주파수가 조정되고, 내면의 다이얼이 조금씩 다른 방향으로 돌아간다. 각 시공간은 완전히 분리되지 않는다. 아니, 분리될 수 없다. 때로는 서로 침투하고, 때로는 충돌하며, 때로는 공명한다. 회사에서의 경험이 집으로 흘러들어오기도 하고, 민구홍 매뉴팩처링의 제품이 「새로운 질서」로 스며들기도 한다. 이런 흐름과 순환 속에서 나는 끊임없이 재구성된다. 그렇게 고정된 실체가 아닌 네 가지 시공간이 만들어내는 무아레(moiré)의 결과물로서 민구홍이 형성된다.

각 시공간을 설명한다면?

집은 연남동에, 회사인 안그라픽스는 합정동에, 「새로운 질서」는 연남동과 웹에, 민구홍 매뉴팩처링은 웹과 집과 회사와 「새로운 질서」 어딘가에 있다. 회사인 안그라픽스는 사회 생활을 처음 시작한 곳이다. 2011년 입사해 2016년 퇴사했고, 2022년 다시 입사했다. 다시 입사하기 전에는 7년 동안 워크룸에서 일했다. 안그라픽스가 설립된 해는 1985년으로, 내가 태어난 해와 같다. 나이가 같은 회사에서 일하며 나이를 먹어가는 기분은 좀처럼 설명하기 어렵다. 「새로운 질서」는 워크룸 시절 시작한 비공식 워크숍에서 움튼 일종의 교육 퍼포먼스로, 2019년 젊은 미술가들이 운영하는 PIE와 함께 본격적으로 시작해 금요일마다 열린다. 「새로운 질서」는 기존 교육 시스템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다. 민구홍 매뉴팩처링은 2015년 설립한 1인 회사로, 내 근무지를 숙주 삼아 기생한다. 미술 및 디자인계 안팎에서 글쓰기와 웹을 컨베이어 벨트 삼아 크고 작은 제품을 생산한다. 민구홍 매뉴팩처링은 내가 경험해온 회사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다. 한편, 내가 지닌 다른 측면을 소환하는 각 시공간은 서로 다른 시간성을 지닌다. 회사는 분, 초 단위로 움직이는 급박한 시간성을, 「새로운 질서」는 학기와 커리큘럼이라는 중간 길이의 시간성을, 민구홍 매뉴팩처링은 제품마다 다른 비정형적 시간성을, 그리고 집은 가장 원초적이고 생물학적인 시간성을. 네 가지 시공간을 오가는 건 서로 다른 속도로 회전하는 네 가지 바퀴 위에서 균형을 잡는 일과 다르지 않다.


민구홍이 가장 좋아하는 태그는 하이퍼링크를 만들어 콘텐츠와 콘텐츠를 잇는 <a> 태그다. 여기서 a는 ‘닻’(anchor)을 뜻한다. <a> 태그는 인쇄물과 웹사이트를 구별 짓는다. 인쇄물에서 각주, 방주, 미주에 불과했던 콘텐츠는 <a> 태그 덕에 웹에서 새로운 지위를 획득했다. 민구홍이 여러 시공간으로 분할되고 통합되듯 우리는 민구홍에게 <a> 태그를 활용한다. 즉, 우리가 민구홍의 각 시공간에서 다른 시공간을 클릭할 때 우리는 그곳에 닻을 내리고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셈이다.


시공간 1: 집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생활방식이란 적절한 시간에 일어나 적절한 시간에 식사하고 적절한 시간에 운동하고 적절한 시간에 자는 것. 이런 적절함을 확보하는 데 적절한 에너지를 소비하는 것. 모자란 잠을 커피나 에너지 드 링크, 서툰 자기최면 등으로 채우는 건 한 달에 한두 번이면 족하다.”

어떤 시공간에도 속하지 않은 온전한 내가 있다면 이 시공간에서는 무엇이 더해지고 무엇이 빠질까?

무방비함이 더해지고, 긴장과 책임이 빠진다. 집 현관에서 신발을 벗는 순간, 누군가의 기대에 부응할 필요가 없는 나만 남는다. 구름 위에 떠 있는 듯한 해방감이 찾아온다. 하지만 이런 무방비함은 양날의 검이기도 하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자유가 이따금 무거운 짐으로 다가온다. 아무런 기대가 없다는 건 어떤 의미에서는 무중력 상태와 같다. 공식이라면 ‘집에서의 민구홍 = 원형으로서의 민구홍 - 사회적 페르소나 + 취약성의 제곱’? 수학적으로는 전혀 말이 안 되겠지만, 감정적으로는 제법 정확한 공식이다.

이 시공간을 신체 부위로 치환한다면?

피부. 피부는 외부와 내부의 경계이자 세상과 나를 잇는 가장 넓은 감각 기관이다. 집이라는 시공간 또한 외부 세계로부터 나를 보호하는 동시에 세상을 느끼는 창구다. 피부가 따뜻한 손길에 반응하듯 집도 누군가의 방문에 반응한다. 피부가 나이를 먹으며 흔적을 남기듯 집도 시간이 지나며 흔적을 간직한다. 그리고 피부처럼 집도 적절한 관리와 돌봄이 필요하다.

이 시공간을 글로 치환한다면? 가독성은 어떨까?

백지. 백지를 무언가로 채워야 할 대상으로 인식하는 순간 백지는 의무가 된다. 하지만 백지 자체에서 무언가를 발견할 수 있다면 백지는 그 자체로 완성된 무엇이 된다. 집 또한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의무감에서 벗어나 그저 있는 그대로의 상태를 즐길 수 있는 시공간이다. 백지에는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 백지에는 아직 쓰이지 않은 모든 이야기가 있다. 가독성으로 말하자면, 백지는 가장 읽기 쉬우면서도 가장 읽기 어려운 텍스트다. 아무 것도 없는 까닭에 어떤 오해도 없지만, 동시에 너무 많은 게 잠재된 까닭에 무엇부터 읽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다. 집에서의 나도 백지 같은 상태가 된다. 가능성으로 가득 차 있지만, 그 어떤 것도 실현할 필요가 없이 자유로운.

이 시공간을 문장부호로 치환한다면?

말줄임표. 집 밖에서는 한글, 알파벳, 가나는 물론이고, 마침표, 느낌표, 물음표, 심지어 쉼표까지 온갖 글자와 기호에 둘러싸여 있다. 그래서인지 집에서는 자연스럽게 그와 멀어진다. 스마트폰은 웬만하면 확인하지 않고, 컴퓨터도 되도록 켜지 않는다. 그저 내가 좋아하는 의자에 앉거나 누워 TV를 보며 흐뭇하게 미소 짓는 게 낙이라면 낙이다. 느닷없이 아내와 결론 없는 농담도 따먹고. 말줄임표에는 이어질 수 있는 무언가를 암시하는 동시에 굳이 그것을 명시하지 않는 여유가 있다. 집에서의 나도 다르지 않다. 할 수 있는 일은 많지만, 굳이 모두 하지 않아도 된다. 완전한 문장이 아니어도 괜찮고, 생각이 끝맺음되지 않아도 편안하게 잠들 수 있다.

“가장 좋아하는 TV 프로그램은요? (…) 너무 사적인 질문 같습니다. 조금 더 친해지면 말씀드릴게요.”

이 시공간을 색으로 치환한다면?

화이트스모크(whitesmoke, #F5F5F5). 오프화이트에 가까운, 모든 것을 포용하기에 적절한 색이다. 실제로 집의 벽지 색이기도 하다. 화이트스모크는 완전한 흰색이 아닌, 미세한 회색을 포함한다. 완전한 흰색이 지닌 차가움과 완벽주의 대신 화이트스모크는 따뜻함과 생활감을 품고 있다. 집이라는 시공간도 이와 같다. 완벽하게 정돈된 쇼룸이 아닌 일상의 흔적과 시간의 층위가 쌓인다. 화이트스모크는 배경색으로서의 의미가 크다. 그 자체가 주목받기보다 그 위에 놓인 다른 요소를 돋보이게 한다. 집도 그렇게 내 생활의 배경이 된다. 그 자체로 화려하거나 강렬하지 않아도, 내 경험과 감정, 관계를 담아내는 캔버스. 화이트스모크는 빛의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아침 햇살, 오후의 그림자, 저녁 조명에 따라 분위기가 미묘하게 달라진다. 집이 하루의 시간과 계절의 변화에 따라 다른 얼굴을 보여주는 것처럼.

이 시공간을 확장자로 치환한다면?

JPG(Joint Photographic Experts Group). JPG는 손실 압축 방식을 사용하는 이미지 파일이다. 저장할 때마다 조금씩 원본의 정보가 손실된다. 집에서의 기억도 그렇다. 매일 저녁 집에 돌아오면 그날의 경험과 감정이 조금씩 압축되고, 불필요한 세부는 사라진다. 아침에 일어나면 또 다른 압축 과정이 진행된다. 그렇게 시간이 지날수록 기억에서는 점점 본질만 남는다. 하지만 JPG 파일처럼 압축 과정에서 미세한 세부가 손실되더라도 전체적인 인상과 감정은 고스란하다. 그게 집이라는 시공간이 지닌 아름다움이자 한계다.

이 시공간을 칼로리로 치환한다면?

약 2,000킬로칼로리. 인간의 기초대사량과 비슷한 수치다. 무리하게 소모하지도, 과도하게 섭취하지도 않는 균형 상태. 이 칼로리는 천천히, 일정하게 소모되며 자연스러운 리듬을 만들어낸다. 수면 중에도 계속 에너지를 소모하는 인체처럼 집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듯 보여도 사실은 내면의 회복과 재생을 위한 중요한 에너지 교환이 일어난다.

「회사 소개」에는 민구홍 매뉴팩처링에서 하지 않는 일 서른일곱 가지가 알파벳순과 가나다순으로 나열돼 있다. 이 시공간에서 하지 않는 일은?

집에서는 아내와 사랑에 빠지지 않는다. 고등학생 시절 처음 만나 대학생 시절 연애를 시작해 지금까지 20년 가까이 함께한 이래 ‘사랑’이라는 말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관계가 있음을 느낀다. 사랑보다 깊은? 또는 사랑보다 높은? 그런 점에서 집에서는 아내와 사랑에 빠지지 않는다. 하지만 ‘사랑’을 대체할 적절한 표현을 찾을 때까지는 아내를 사랑할 수밖에 없다. 한편, ‘빠진다’는 말에 주목하면, 무언가에 빠진다는 건 일시적인 상태, 예측하지 못한 상황을 뜻한다. 하지만 아내와 함께하는 관계는 더 이상 ‘빠지는’ 게 아니라 ‘있는’ 것이다. 물고기가 물에 빠지지 않고 물속에 있는 것처럼 집에서 아내와 나는 서로에게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끼는 주체와 객체가 아닌 함께 호흡하는 하나의 생태계와 같다. 그런 점에서 집에서는 아내와 사랑에 빠지지 않는다. 그저 사랑 안에 있을 뿐이다.

이 시공간의 나를 규정하는 타인은?

아내와 반려 고양이 조조. 그들의 시선 속에서 나는 남편이고 집사다. 아내에게 나는 그저 서로 아끼고 자주 생각하는 사람일 뿐이다. 조조에게도 마찬가지다. 조조에게는 내가 어떤 일을 하는지, 어떤 사람인지는 별로, 또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오직 함께 있다는 사실, 그리고 적절한 시간에 사료와 물을 채워준다는 사실만이 중요하다. 이런 단순한 관계가 선사하는 안정감은 다른 어떤 사회적 인정보다 깊다. 역설적으로 가장 단순하게 나를 바라보는 이들 앞에서 가장 복잡한 나를 드러낼 수 있다.

엉망진창에 대해 이 시공간의 나는 어떻게 대처할까?

집에서의 나는 엉망진창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때로는 엉망진창이 가장 편안한 상태일 수 있는 까닭이다. 아침에 일어나 침대를 정리하지 않고, 책상 위에 어제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어도 괜찮다. 백지 같은 집에서의 엉망진창은 일종의 자연스러운 패턴, 즉 살아 있음의 증거다. 피부에 생기는 작은 상처나 주름처럼 그것들이 오히려 진짜 나를 만든다. 온전한 휴식은 완벽함이 아닌 불완전함 속에서 더 잘 찾아오기도 한다. 집에서의 나는 이런 혼돈을 통제하려 애쓰기보다 그 속에서 패턴을 발견하고 그것이 자연스럽게 정리되는 시간을 기다린다.

이 시공간의 내게 해주고픈, 또는 이 시공간의 내가 듣고픈 말은?

내 취약함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를.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허락을 스스로에게 더 자주 내려주기를. 백지 상태의 가치를 알아보기를. 침대에서 깨어날 때 느끼는 그 미세한 기쁨, 아내와 나누는 소소한 일상의 대화, 조조와 교감하는 순간이 사실 생활에서 가장 본질적인 부분임을 기억하기를. 생산성이나 성취와 무관하게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는 용기를 지니기를. 집이라는 시공간이 화이트스모크처럼 따스하고 포용적인 건 그곳에서 내 모든 다른 정체성을 내려놓을 수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기억하기를. 때로는 그저 창밖을 바라보며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 시간이 다른 시공간에서의 분주한 활동보다 더 깊은 의미를 품고 있음을 알아차리기를.


시공간 2: 회사

“AG 랩은 안그라픽스의 새싹 또는 홀씨 또는 곁가지입니다. AG 랩에서는 (1) 안그라픽스가 35년여 동안 한국 디자인계에서 쌓아온 유산을 재료 삼아 안그라픽스 안팎, 즉 구성원과 잠재 고객에게 영감과 용기를 선사하는 크고 작은 일을 기획하고 수행하는 한편, (2) 이를 통해 온라인과 오프라인에서 콘텐츠를 생산하고 다루는 여러 방식을 모색하는 한편…”

어떤 시공간에도 속하지 않은 온전한 내가 있다면 이 시공간에서는 무엇이 더해지고 무엇이 빠질까?

사회적 책임감이 더해지고, 개인적인 감정이 빠진다. 거리로 따지면 온전한 나와 가장 거리가 멀다. 사회적 책임감 때문에 디자인 에이전시의 디렉터 또는 이사라는 역할극을 하는 셈이다. 이 역할극은 가면을 쓰는 게 아니라 특정한 렌즈를 끼는 일에 가깝다. 내 본질은 변하지 않지만, 다른 것을 보고 받아들이는 방식이 달라진다. 회사라는 시공간에서는 ‘민구홍’이라는 개인보다 ‘안그라픽스 랩의 디렉터’라는 역할이 앞선다. 이런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개인적인 취향이나 감정을 보류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고 감정이 완전히 사라지는 건 아니다. 표면으로 드러나지 않도록 제어할 뿐이다. 물 아래 숨겨진 빙산의 큰 부분처럼 감정은 여전히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는다. 이런 제어와 균형은 피로감을 동반하지만, 전문성을 위해서는 필수적이다.

이 시공간을 신체 부위로 치환한다면?

척추. 척추는 신체의 구조적 중심축이자 전체 시스템을 지탱하는 기둥이다. 회사 또한 확고한 원칙과 체계가 없다면 조직 전체가 흔들릴 수 있다. 척추는 단일한 뼈가 아니라 여러 뼈가 유기적으로 연결된 복합 구조다. 한 마디가 문제가 생기면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 회사 또한 여러 부서와 팀, 개인이 유기적으로 연결된 시스템이다. 척추는 유연성과 견고함의 절묘한 균형을 보여준다. 너무 경직되면 부러지고, 너무 유연하면 지지력을 잃는다. 회사에서는 이처럼 변화에 적응할 수 있는 유연성과 핵심 가치를 지켜내는 견고함 사이의 균형이 중요하다. 디스크 같은 예상치 못한 사건은 장기간의 잘못된 자세나 과도한 압박에서 비롯한다. 회사에서도 단기적 성과에 집착하거나 구성원들에게 지속 불가능한 압박을 가하면, 결국 시스템 전체가 무너진다.

이 시공간을 글로 치환한다면? 가독성은 어떨까?

논문. 회사에서의 모든 프로젝트는 명확한 주제와 목적, 방법론, 결과, 그리고 결론이 필요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객관적이어야 한다. 주관적인 감상이나 직관이 아닌, 데이터와 논리에 기반한 판단이 요구된다. 논문은 형식이 중요하다. 들여쓰기, 문단 구성, 인용 방식, 참고 문헌 등 세세한 형식적 요소가 전체의 신뢰성을 좌우한다. 회사의 프로젝트도 이와 다르지 않다. 아무리 내용이 훌륭해도 형식이 갖춰지지 않으면 신뢰를 얻기 어렵다. 가독성으로 말하자면, 논문은 쉽게 읽히기 위한 게 아니라 정확하게 이해되기 위한, 그리고 나중에 다시 참조되기 위한 텍스트다. 회사에서의 소통 또한 일시적인 공감이나 즐거움보다 정확한 정보 전달과 기록이 우선시된다.

이 시공간을 문장부호로 치환한다면?

마침표. 회사에서 두루뭉술함은 적에 가깝다. 마침표는 모호함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것은 생각의 끝과 다른 생각의 시작을 분명히 표시한다. 회사에서의 업무도 이와 다르지 않다. 하나의 프로젝트가 확실히 종료돼야 다음 프로젝트로 넘어갈 수 있고, 한 단계가 완전히 완료돼야 다음 단계로 진행할 수 있다. 마침표가 없는 글은 혼란스럽고 가독성이 떨어진다. 회사에서도 명확한 경계와 기준점이 없다면 효율성이 떨어진다. 마침표는 리듬감을 부여하기도 한다. 긴 문장을 적절히 나누어 숨 쉴 공간을 만들어준다. 회사에서의 일정과 마감도 이런 리듬을 만든다. 지속적인 긴장 상태가 아닌 긴장과 이완, 집중과 휴식이 적절히 교차하는 리듬. 마침표는 확정성의 상징이다. 일단 찍히고 나면 되돌리기 어렵다. 회사에서의 의사 결정도 그렇다. 한번 결정되고 실행된 사항은 쉽게 번복하기 어려운 까닭에 더욱 신중해진다.

이 시공간을 색으로 치환한다면?

검은색(black, #000000) 또는 흰색(white, #FFFFFF). 극단에 있는 두 색은 모두 색상이 없고, 채도도 없다. 다른 건 명도뿐이다. 회사에서는 이런 극단적 선명함이 요구된다. 모호함보다는 명확함, 복잡함보다는 단순함. 회사에서 나는 때로는 흰색처럼 모든 가능성을 열어둬야 하고, 때로는 검은색처럼 냉정하게 결정해야 한다. 두 가지 색 사이에는 무한한 회색 스펙트럼이 존재하지만, 회사에서는 그 중간 지대를 인정하기 어렵다. 회사는 근본적으로 이분법적인 시공간이다. 성공과 실패, 수익과 손실, 효율과 비효율, 출근과 퇴근.

이 시공간을 확장자로 치환한다면?

PDF(Portable Document Format). PDF는 완결성과 안정성을 상징하는 파일 형식이다. 최종 결과물로서, 형태가 고정되어 어떤 기기나 시스템에서도 동일하게 보이도록 설계됐다. 회사에서의 결정이나 프로젝트도 이와 비슷하다. 일단 확정되면 그 형태를 유지해야 한다. 무언가를 변경할 때는 시간과 비용을 수반한다. PDF 파일이 워드 문서나 인디자인 파일 같은 편집 가능한 원본 파일과 구분되듯 회사에서도 작업 과정과 최종 결과물은 명확히 구분된다. 작업 과정에서는 다양한 실험과 수정이 가능하지만, 최종 결과물은 변경이 제한적이다. 회사라는 시공간에서 일의 대부분은 이런 불변성을 향한다. 초안에서 최종안으로, 아이디어에서 제품으로, 계획에서 실행으로. 이 과정에서 점점 더 많은 요소가 고정되고, 결국 PDF 파일처럼 변경하기 어려운 최종 형태에 도달한다. 이런 불변성은 이따금 답답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동시에 일관성과 안정성이라는 또 다른 가치를 제공한다.

이 시공간을 칼로리로 치환한다면?

약 3,500킬로칼로리. 고강도 운동을 할 때 소모되는 수준의 에너지량이다. 의식적인 노력과 집중을 요구하며, 지속적으로 이 상태를 유지하면 필연적으로 소진된다. 따라서 적절한 휴식과 재충전이 필요하다. 이 에너지는 주로 두뇌 활동과 사회적 상호작용에 집중적으로 소모된다. 생각보다 많은 칼로리가 대인관계를 유지하는 데 사용된다.

「회사 소개」에는 민구홍 매뉴팩처링에서 하지 않는 일 서른일곱 가지가 알파벳순과 가나다순으로 나열돼 있다. 이 시공간에서 하지 않는 일은?

회사에서는 회사와 사랑에 빠지지 않는다. 주위를 보면 회사와 사랑에 빠져 일과 생활이 한 몸이 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20대 시절 사사한 안상수 선생님 또한 비슷한 말씀을 하셨다. “일이 곧 생활이 돼야 한다.” 그 또한 아름답고 가치 있는 일이지만, 회사에서만큼은 일과 생활을 엄격히 구분하고 싶다. 회사를 나서는 순간 내 인생에서 회사는 사라진다. 이는 회사에 대한 냉담함이 아닌 오히려 건강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거리두기다. 사랑이 거리를 필요로 하듯 직업적 열정도 적절한 거리가 필요하다. 회사와의 거리가 없다면, 객관성을 잃을 수밖에 없다. 이는 결과적으로 회사뿐 아니라 내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회사를 떠나는 순간 회사를 잊는다는 말을 마음의 리부팅과 같다. 그래야 다음 날 다시 일을, 나아가 회사를 새로운 눈으로 볼 수 있으니까.

이 시공간의 나를 규정하는 타인은?

동료들과 클라이언트들. 그들의 기대와 요구는 내가 회사에서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끊임없이 정의한다. 흥미로운 점은 동료들이 주로 내 능력과 전문성에 주목한다면, 클라이언트들은 결과물에 집중한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동료들 앞에서는 과정으로서의 민구홍이, 클라이언트들 앞에서는 결과로서의 민구홍이 되곤 한다. 두 가지 시선 사이에서 균형을 찾는 일이 회사라는 시공간에서의 핵심 과제다. 때로는 이 두 시선이 충돌하기도 한다. 동료들이 인정하는 과정의 가치와 클라이언트들이 요구하는 결과의 품질이 항상 일치하지는 않는 까닭이다. 그럴 때마다 나는 일종의 번역자가 된다. 과정의 가치를 결과물에 녹여내고, 결과물의 요구 사항을 과정으로 재해석하는 일. 회사라는 시공간에서 나는 결국 이런 번역 과정 속에서 정의된다.

엉망진창에 대해 이 시공간의 나는 어떻게 대처할까?

회사에서의 나는 엉망진창을 구조화하려 한다. 척추처럼 중심을 먼저 잡고, 무엇이 본질적인 문제인지 파악한다. 엉망진창 상황에서도 명확한 우선순위를 설정하고, 하나씩 마침표를 찍어가며 정리한다. 때로는 이 과정에서 동료들과 책임을 분배하기도 한다. 회사에서의 엉망진창은 종종 예상치 못한 기회를 제공하기도 한다. 기존 시스템이 무너졌을 때, 더 효율적인 새로운 구조를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리는 까닭이다. PDF처럼 고정된 것을 편집 가능한 상태로 다시 열어볼 수 있는 순간. 하지만 회사에서의 나는 이런 재구조화 과정에서도 감정적 동요를 최소화하려 노력한다. 차분하게 상황을 분석하고, 논리적인 해결책을 찾아가는 데 집중한다.

이 시공간의 내게 해주고픈, 또는 이 시공간의 내가 듣고픈 말은?

척추를 곧게 펴되 가끔은 유연하게 굽힐 줄도 알기를. 모든 결정에 완벽한 마침표를 찍으려 애쓰지 말고, 때로는 쉼표와 물음표를 허용하기를. 디렉터나 이사로서의 역할에 너무 매몰되지 말고, 그 역할 너머의 민구홍을 잊지 않기를. 회사의 성패가 전적으로 내 책임이 아님을 받아들이고, 그렇기에 동료들과 책임을 나눌 줄 알기를. PDF처럼 한번 결정되면 수정하기 어려운 상황에서도 필요하다면 과감히 수정을 시도할 용기를 가지기를. 일과 생활을 엄격히 구분하는 것은 현명한 선택이지만, 그 경계에서 때로는 일의 의미와 생활의 풍요로움이 서로를 강화할 수 있음을 발견하기를. 회사라는 시공간에서 내 결정과 행동이 만들어내는 영향력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그 책임을 두려워하지 말기를.


시공간 3: 새로운 질서

“어떤 대상을 좋아하고, 급기야 사랑하게 되면 그 아름다운 마음을 주위와 나누고 싶게 마련이다.”

어떤 시공간에도 속하지 않은 온전한 내가 있다면 이 시공간에서는 무엇이 더해지고 무엇이 빠질까?

질문이 더해지고, 확신이 빠진다. 무언가를 이야기하다 보면 두려움 같은 게 밀려오며 내가 던진 말의 무게를 실감하게 된다. 누군가는 「새로운 질서」가 작은 학교, 또는 신흥 종교 같다고 말한다. 하지만 「새로운 질서」에서는 선생과 학생, 교주와 신도의 구분이 뚜렷하지 않다. 「새로운 질서」에서 모두는 그저 친구일 뿐이다. 블랙 마운틴 칼리지(Black Mountain College), 또는 퀘이커(Quaker)처럼. 이 시공간에서는 내가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확신이 모두 물음표로 바뀐다. 이는 무지의 인정이 아닌 지식의 상대성에 대한 인식이다. 아는 게 많아질수록 모르는 게 더 많아진다는 역설. 「새로운 질서」에서 나는 가르치는 사람인 동시에 배우는 사람이 된다. 질문을 던지는 순간, 질문은 내게 돌아오고, 내가 제시하는 답변 또한 다시 질문의 형태로 되돌아온다. 이런 끊임없는 질문과 답변의 순환 속에서 몬테소리 교육에서 중요시하는 ‘준비된 환경’처럼 나는 그저 질문이 식물처럼 자라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역할을 할 뿐이다.

이 시공간을 신체 부위로 치환한다면?

혀. 혀는 우리 신체에서 가장 다기능적인 부위 가운데 하나다. 말하기, 맛보기, 삼키기, 심지어 청소하기까지 다양한 기능을 수행한다. 「새로운 질서」도 이처럼 여러 역할을 동시에 수행한다. 지식을 전달하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맛보고, 유용한 정보를 소화하는 시공간. 혀는 감각과 표현의 도구다. 맛을 느끼고, 그 느낌을 언어로 표현한다. 「새로운 질서」에서도 이런 감각과 표현의 순환이 중요하다. 웹이라는 매체를 경험하고, 그 경험을 다시 언어화하는 과정. 혀는 끊임없이 움직이고 변형된다. 상황에 따라 모양을 바꾸고, 다른 부위와 협업하며 작동한다. 「새로운 질서」 또한 고정된 형태가 아니라, 친구들과 맥락에 따라 유동적으로 변화하는 시공간이다. 혀는 경계에 위치한 기관이다. 내부와 외부의 경계, 생각과 표현의 경계, 개인과 타인의 경계에서 작동한다. 「새로운 질서」도 이런 경계에 존재한다. 학교와 사회의 경계, 가상과 현실의 경계, 기술과 인문학의 경계를 넘나드는 시공간.

이 시공간을 글로 치환한다면? 가독성은 어떨까?

목록. 「새로운 질서」는 체계적이면서도 열린 구조를 지닌다. 목록은 항목을 명확하게 구분하는 동시에 각 항목 사이의 관계나 중요도는 독자의 해석에 맡긴다. 읽는 사람에 따라 특정 항목에 더 주목할 수도 있고, 전체를 한 번에 훑어볼 수도 있다. 「새로운 질서」에서의 교육도 그렇다. 커리큘럼이라는 목록은 있지만, 그 안에서 각자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찾아가는 과정이 중요하다. 가독성으로 말하자면, 목록은 선형적 읽기와 비선형적 읽기를 모두 허용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순서대로 읽을 수도 있고, 필요한 부분만 골라 읽을 수도 있다. 그런 점에서 목록은 하이퍼텍스트의 원형과 같다. 각 항목이 독립적이면서도 전체와 연결되어 있는 구조. 「새로운 질서」도 그런 열린 구조를 지향한다.

이 시공간을 문장부호로 치환한다면?

물음표. 「새로운 질서」는 본질적으로 질문하는 시공간이다. 물음표는 진술을 의문으로, 확신을 가능성으로 전환하는 힘을 지녔다.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을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부호. 물음표는 열린 시공간을 만든다. 마침표가 담론을 닫는다면, 물음표는 담론을 열어둔다. 대화와 탐구의 가능성을 확장하는 것. 「새로운 질서」 또한 닫힌 답변보다 열린 질문을 중시한다. 기존의 패턴을 벗어나 새로운 눈으로 문제를 바라보는 것. 「새로운 질서」에서의 학습도 이런 전환의 연속이다. 당연하게 여겨온 것에 의문을 품고, 그 의문을 통해 새로운 이해의 지평을 열어가는 과정. 물음표는 초대의 제스처이기도 하다. 타인의 생각과 의견을 요청하는 열린 손짓. 「새로운 질서」도 일방적인 전달보다는 공동의 탐구를 지향하며 모든 친구들을 대화의 주체로 초대한다.

이 시공간을 색으로 치환한다면?

스노(snow, #FFFAFA). 웹에서 규정한 눈의 색이다. 화이트(white)와는 다르다. 화이트에 핑크가 아주 살짝 섞여 있다. 질문이라는 건 이제껏 밟아보지 않은 눈밭에 때로는 얕게, 때로는 깊게 발자국을 찍는 일이기도 하니까. 스노는 완벽한 흰색이 아닌, 미세한 색조를 품고 있다. 그 미묘한 뉘앙스는 처음에는 잘 보이지 않지만, 주의 깊게 관찰할 때 비로소 감지된다. 「새로운 질서」도 그렇다. 표면적으로는 그저 코딩 또는 디자인 교육처럼 보일 수 있지만, 그 안에는 미세한 문학적, 철학적, 미학적 뉘앙스가 녹아 있다. 또한 눈은 쌓이면 쌓일수록 더 깊어진다. 처음에는 얕은 질문으로 시작하지만, 점차 더 깊은 탐구로 이어지는 「새로운 질서」의 여정과도 닮았다. 눈밭에 발자국을 남기는 행위는 공동의 작업이기도 하다. 한 사람의 발자국이 다른 사람의 길이 되고, 그 길이 또 다른 탐험을 이끈다. 「새로운 질서」에서도 각자의 질문과 발견이 공유되며, 집단적 지식의 지형을 형성해간다.

이 시공간을 확장자로 치환한다면?

HTML(HyperText Markup Language). HTML은 파일 형식이기도 하지만 하나의 언어이자 구조다. 태그로 시작해 태그로 끝나는 체계적인 구조, 그리고 그 안에서 무한한 표현이 가능한 유연성을 갖추고 있다. 「새로운 질서」또한 다르지 않다. 커리큘럼이라는 구조는 있지만, 그 안에서 각자의 관심사와 속도에 따라 다양한 경로를 탐색한다. HTML은 연결성의 언어다. 하이퍼링크를 통해 다른 페이지나 자원과 연결되며, 그 자체로는 완결되지 않는다. 「새로운 질서」 또한 독립된 교육 프로그램이 아닌 더 넓은 웹 생태계와 연결된 열린 커뮤니티를 지향한다. HTML이 웹 브라우저를 통해 비로소 시각적으로 구현되듯 「새로운 질서」의 지식과 질문도 친구들의 마음속에서 다른 모습으로 해석되고 구현된다. 그런 의미에서 HTML은 잠재성의 언어이고, 「새로운 질서」는 잠재성의 시공간이다.

이 시공간을 칼로리로 치환한다면?

약 2,500킬로칼로리. 지적 탐구에 필요한 중간 정도의 에너지량이다. 이것은 꾸준히 장시간 유지할 수 있는 수준인 동시에 의미 있는 결과물을 만들어내기에 충분한 에너지다. 이 에너지의 특징은 소모되는 만큼 다시 채워지는 경향이 있다는 점이다. 질문하고 가르치는 과정에서 오히려 새로운 에너지가 생성되는 선순환 구조가 형성된다.

「회사 소개」에는 민구홍 매뉴팩처링에서 하지 않는 일 서른일곱 가지가 알파벳순과 가나다순으로 나열돼 있다. 이 시공간에서 하지 않는 일은?

「새로운 질서」에서는 확신과 사랑에 빠지지 않는다. 무엇보다 질문이 중요한 시공간인 만큼 이제껏 정답이라 믿어온 것 또한 질문의 대상이 된다. 확신과 사랑에 빠지지 않는다는 말은 교조적 신념이나 맹목적 열정을 경계한다는 의미다. 아무리 훌륭해 보이는 아이디어나 방법론이라도 그것을 절대적 진리로 받아들이는 순간 사고는 거기서 멈춘다. 「새로운 질서」에서는 모든 게 잠정적이다. 오늘의 정답이 내일의 의문이 될 수 있고, 지금의 최선책이 나중에는 한계로 드러날 수 있다. 이런 불확실성을 받아들이는 게 「새로운 질서」의 핵심이다. 요컨대 건강한 회의주의를 유지하는 게 더 깊은 이해로 나아가는 길이다. 따라서 「새로운 질서」에서는 확신보다 의심, 사랑보다 호기심이 더 중요하다.

이 시공간의 나를 규정하는 타인은?

웹을 사랑하는, 또는 전보다 조금 더 사랑할 친구들. 그들은 모두 다른 배경과 관심사를 가지고 있지만, 웹이라는 공통 관심사를 통해 연결된다. 이들 앞에서 나는 민구홍이라는 개인인 동시에 동시에 「새로운 질서」의 일원이 된다. 이런 이중적 정체성 속에서 나는 때로는 안내자가, 때로는 동반자가 된다. 친구들의 질문과 호기심이 내가 누구인지 끊임없이 재정의한다. 그들이 웹을 더 깊이 이해할수록 나 또한 웹을 새롭게 바라보게 된다. 일종의 거울 효과다. 내가 그들에게 웹을 비추는 거울이 되고, 그들 또한 나에게 웹을 비추는 거울이 된다. 이런 상호 반사의 과정 속에서 우리는 함께 성장한다. 「새로운 질서」라는 시공간에서 나는 결국 집단적 성장의 촉매제가 된다.

엉망진창에 대해 이 시공간의 나는 어떻게 대처할까?

「새로운 질서」에서의 나는 엉망진창을 질문의 기회로 삼는다. 혼돈 속에서 새로운 패턴과 관계를 발견하려 한다. 무엇이 이런 상태를 만들었는지, 여기서 무엇을 배울 수 있는지 탐구한다. 「새로운 질서」에서의 엉망진창은 오히려 교육적 가치를 지닌다. 친구들과 함께 그 혼돈을 분석하고, 해결 과정을 공유하며 집단적 학습 경험으로 전환한다. 혀가 다양한 맛을 구분하듯 엉망진창 속에서 다양한 요소를 분별하고 그 관계를 파악하려 한다. 때로는 그 과정 자체가 목표가 되기도 한다. 「새로운 질서」에서는 엉망진창을 해결하는 것보다 그것을 이해하고 질문하는 것에 더 큰 가치가 있다.

이 시공간의 내게 해주고픈, 또는 이 시공간의 내가 듣고픈 말은?

물음표를 던지는 것만큼이나 그 물음표 앞에서 나 자신도 흔들릴 줄 알기를. 친구들과 함께하는 이 여정에서 가르치는 역할과 배우는 역할 사이의 경계가 얼마나 모호한지 계속 느끼기를. 웹이라는 눈밭에 찍는 발자국이 그저 흔적이 아니라 누군가에게는 길이 될 수 있음을 기억하기를. 혀로 맛을 보듯 새로운 생각을 맛보고, 그것을 다시 말로 표현하는 순환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기를. 코드와 웹을 통해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일의 의미를 깊이 인식하길하기를. 확신이나 사랑에 빠지지 않겠다는 다짐은 중요하지만, 때로는 느닷없는 열정이 새로운 발견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도 인정하기를. 눈의 색처럼 미묘한 뉘앙스를 품은 질문이 이따금 가장 선명한 통찰로 이어질 수 있음을 신뢰하기를.

“지금까지 경험해본 바로는 이해할 수 없는 대상과 사랑에 빠지는 건 이따금 감행해볼 만한 일이다. 모든 게 엉망진창이 되리라는 것을 예감하더라도 몸과 마음을 그저 흐름에 맡겨보는 것.”


시공간 4: 민구홍 매뉴팩처링

“민구홍 매뉴팩처링은 편집자뿐 아니라 여러 직함을 지닌 민구홍이 오직 자신의 행복에 초점을 두고 자신을 편집한 결과물, 또는 그 결과물을 도출해내기 위한 편집 지침일지 모른다.”

어떤 시공간에도 속하지 않은 온전한 내가 있다면 이 시공간엣는 무엇이 더해지고 무엇이 빠질까?

즉흥성이 더해지고, 질서가 빠진다. 일단 해보고 그에 맞는 이유를 만드는 방식. 이미 시스템, 즉 형식이 정해진 회사와 달리 나를 위해 형식을 만드는 셈이다. 민구홍 매뉴팩처링은 어떤 의미에서는 실험실에 가깝다. 다른 시공간에서는 할 수 없거나 하기 어려운 일을 시도해볼 수 있는. 여기서 즉흥성은 단순한 충동이 아닌 직관과 경험이 결합된 반응이다. 재즈 연주자가 주어진 화성 진행 안에서 자유롭게 즉흥 연주를 하듯 나 또한 글쓰기와 웹을 통해 이리저리 움직인다. 질서가 빠진다는 건 무질서를 뜻하지 않는다. 오히려 외부에서 부과된 질서가 아닌, 제품 자체에서 유기적으로 생성되는 질서를 따른다는 뜻이다. 이런 유기적 접근은 이따금 비효율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예상치 못한 발견의 계기가 된다. 민구홍 매뉴팩처링은 궁극적으로 ‘민구홍다움’을 탐구하는 시공간이다. 다른 시공간에서는 항상 타협과 조정이 필요하지만, 여기서만큼은 온전히 내 감각과 판단을 따를 수 있다.

이 시공간을 신체 부위로 치환한다면?

손과 머리. 오늘날 인공지능이 아무리 발전하더라도 손이 없으면 그와 진솔한 대화를 나눌 수 없다. 그리고 그런 손을 움직이는 건 결국 머리다. 손과 머리의 조합은 창조와 실행의 균형을 상징한다. 머리는 아이디어를 구상하고, 손은 그것을 형태로 만들어낸다. 민구홍 매뉴팩처링 또한 개념과 실행 사이의 밀접한 연결을 중시한다. 손은 세상과 직접 접촉하는 기관이다. 표면의 질감을 느끼고, 물체의 무게를 가늠하고, 미세한 움직임을 통해 정교한 작업을 수행한다. 이런 촉각적 지식은 디지털 시대에도 여전히 중요하다. 화면 너머의 추상적 정보를 넘어 물질과 직접 교감하는 경험. 머리는 패턴을 인식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기관이다. 단순한 데이터를 지식으로, 지식을 지혜로 변환하는 과정을 담당한다. 민구홍 매뉴팩처링의 핵심은 이런 의미 생성의 과정이다. 코드나 디자인을 넘어 그것이 어떤 맥락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고민하는 것. 손과 머리의 연결은 이론과 실천, 생각과 행동의 통합을 상징한다. 머리가 아무리 훌륭한 아이디어를 떠올려도 손이 구현하지 못하면 의미가 없고, 손이 아무리 부지런히 움직여도 머리의 방향 설정 없이는 의미 있는 결과를 만들어내기 어렵다.

이 시공간을 글로 치환한다면? 가독성은 어떨까?

시 또는 소설. 민구홍 매뉴팩처링에서는 논리적 일관성보다 감성적 일관성을 중시한다. 시처럼 간결하면서도 함축적인 표현을 추구하기도 하고, 소설처럼 다양한 관점과 목소리를 담아내기도 한다. 중요한 건 정해진 형식보다는 내용에 맞는 형식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시나 소설은 독자와의 적극적인 상호작용을 전제로 한다. 모든 것을 명시적으로 설명하지 않고, 독자의 상상력과 해석을 위한 여백을 남긴다. 민구홍 매뉴팩처링에서 또한 완전히 규정된 제품보다 사용자나 관객이 자신만의 방식으로 해석하고 경험할 수 있는 열린 작업을 지향한다. 가독성으로 말하자면, 시나 소설은 일차적 의미와 이차적 의미, 명시적 내용과 함축적 내용이 공존한다. 처음 읽을 때와 다시 읽을 때 다른 의미를 발견할 수 있는 층위의 다양성.

“작년 늦여름, 민구홍 매뉴팩처링은 느닷없이 찾아온 수상한 인물들에게 포위당하고, 급기야 납치당했다.”

이 시공간을 문장부호로 치환한다면?

느낌표. 그저 이런 걸 해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머릿속 어딘가에 느낌표가 떠오르고 찍힌다. 느낌표는 갑작스러운 깨달음과 열정을 상징한다. 평온하게 전개되던 문장 속에 느닷없이 등장해 강렬한 감정과 긴급함을 부여한다. 민구홍 매뉴팩처링에서는 모든 게 이런 느낌표처럼 시작된다. 일상적인 사고의 흐름 속에서 느닷없이 번뜩이는 무언가. 느낌표는 행동의 촉구를 뜻한다. 단순한 진술을 명령이나 권고로 바꾸는 힘이 있다. 느낌표가 찍히는 순간, 추상적 가능성이 구체적 제품으로 전환된다. 생각에 머물지 않고 실제 행동으로 옮기는 결단의 순간. 느낌표는 고유의 리듬감을 지닌다. 일반적인 흐름을 끊고 주의를 환기시키는 역할. 이런 리듬의 변화는 작업 과정에서 필수적이다. 익숙한 패턴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각을 만나는 예상치 못한 단절과 도약.

이 시공간을 색으로 치환한다면?

파란색(blue, #0000ff). 하이퍼링크를 상징하는 색이다. 민구홍 매뉴팩처링이 글쓰기와 웹을 컨베이어 벨트로 삼는 만큼 제법 어울리는 색인 것 같다. 파란색은 디지털 세계와 물리적 세계를 연결하는 색이다. 스크린 속 텍스트가 파란색으로 변할 때 그것은 정보를 넘어 다른 시공간으로의 입구가 된다. 민구홍 매뉴팩처링도 이런 연결의 시공간을 지향한다. 서로 다른 생각, 분야, 사람을 연결하는 교차점. 파란색은 깊이와 무한함을 상징한다. 바다와 하늘의 색으로, 탐구 가능한 무한한 시공간을 암시한다. 민구홍 매뉴팩처링도 이런 무한한 가능성을 품고 있다. 정해진 경계 없이 계속해서 확장되고 발전할 수 있는 열린 구조. 파란색은 신뢰와 안정성의 색이기도 하다. 많은 기업이 로고에 파란색을 사용하는 까닭이다. 민구홍 매뉴팩처링에서도 이런 신뢰가 중요하다. 실험적인 접근법을 취하지만, 기본적인 품질과 진정성에 대한 약속을 지키는 것.

이 시공간을 확장자로 치환한다면?

TXT. 민구홍 매뉴팩처링의 본질은 결국 단순함과 근본으로의 회귀에 있다. TXT 파일은 가장 기본적이고 순수한 형태의 디지털 문서다. 특별한 서식이나 꾸밈 없이 오직 텍스트만으로 구성된다. 이 단순함은 역설적으로 무한한 가능성을 품는다. 모든 복잡한 디지털 형식의 기초가 되는 근본적인 형태인 까닭이다. 민구홍 매뉴팩처링도 이런 근본적인 가치를 추구한다. 화려한 기술이나 복잡한 방법론보다 본질적인 아이디어와 내용에 집중하는 접근법. TXT 파일은 거의 모든 컴퓨터 시스템에서 읽을 수 있는 보편적 호환성을 갖추고 있다. 특정 소프트웨어나 플랫폼에 종속되지 않는 독립성. 민구홍 매뉴팩처링은 이런 경계를 넘나드는, 또는 구부러뜨리는 보편성을 지향한다. 디자인, 기술, 문학 등 다양한 분야를 오가며 어느 한 영역에 갇히지 않는 상태. TXT 파일은 변형의 가능성을 열어둔다. 가장 기본적인 형식인 까닭에 어떤 방향으로든 발전시킬 수 있는 출발점이 된다. 민구홍 매뉴팩처링의 제품뿐 아니라 민구홍 매뉴팩처링 자체도 이렇게 열린 가능성을 품고 있다. 명확한 결론이나 완결된 형태보다 지속적인 발전과 변형을 허용하는 열린 구조.

이 시공간을 칼로리로 치환한다면?

불규칙하다. 때로는 100킬로칼로리처럼 가볍게 소모되다가 느닷없이 5,000킬로칼로리가 필요한 순간이 찾아온다. 이런 불규칙성이 이 시공간의 특징이다. 예측하기 어려운 에너지 소모 패턴은 제품을 생산하는 과정의 본질을 반영한다. 무언가 떠오르는 순간의 폭발적 에너지와 그 사이의 잠복기를 오가는 리듬. 이 불규칙성 덕에 역설적으로 지속 가능한 작업이 가능해진다.

「회사 소개」에는 민구홍 매뉴팩처링에서 하지 않는 일 서른일곱 가지가 알파벳순과 가나다순으로 나열돼 있다. 이 시공간에서 하지 않는 일은?

민구홍 매뉴팩처링에서는 제품과 사랑에 빠지지 않는다. 내가 좋아하는 워크룸 김형진 선배의 말을 늘 기억한다. “작업을 마친 순간 곧장 거기서 빠져나와야 한다.” 결국 제품과 사랑에 빠지지 않는다는 말은 완성된 결과물에 지나치게 애착을 갖지 않는다는 뜻이다. 작업은 결국 놓아주는 것이다. 아무리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였더라도, 언젠가는 그것을 세상에 내보내고 다음 작업으로 넘어가야 한다. 이런 심리적 분리는 감정적으로는 쉽지 않지만, 성장을 위해서는 필수적이다. 제품에 지나치게 사랑에 빠지면, 한계나 개선점을 볼 수 없다. 새로운 가능성을 놓칠 가능성도 크다. 따라서 민구홍 매뉴팩처링에서는 제품보다 제품을 만드는 과정을 사랑한다. 결과물보다 과정에, 도착보다 여행에 더 의미를 두는 것. 그래야 다음 여행을 위한 에너지와 호기심을 유지할 수 있다.

“이따금 귀사의 에고트립이 혐오스러울 지경입니다.”

이 시공간의 나를 규정하는 타인은?

2024년 겨울 느닷없이 다섯 번째 인턴이 된 백창인(https://www.baekchangin.com). 그와 관계는 나를 돌아보게 만든다. 그에게 무언가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내가 당연하게 여겨온 가정이 드러나는 까닭이다. “왜 그런가요?” 같은 질문에 답하며 나는 민구홍 매뉴팩처링의 작업 방식을 재검토하게 된다. 그런 점에서 그는 내게 거울이자 촉매제다. 한편, 그와의 관계는 시간적 연속성을 지닌다.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 그리고 미래의 인턴 사이의 대화. 이 시간적 연결 속에서 나는 전수자인 동시에 학습자가 된다. 전문적 지식과 경험을 전달하며 새로운 관점과 방식을 배우는 이중적 위치. 민구홍 매뉴팩처링이라는 시공간에서 나는 결국 이런 지속적인 대화와 학습의 과정 속에서 정의된다.

엉망진창에 대해 이 시공간의 나는 어떻게 대처할까?

민구홍 매뉴팩처링에서의 나는 엉망진창을 창작의 기회로 활용한다. 혼돈이 새로운 아이디어와 접근법을 촉발하는 촉매제가 될 수 있는 까닭이다. 때로는 의도적으로 엉망진창을 만들기도 한다. 질서정연한 상태에서는 발견할 수 없었던 하이퍼링크와 가능성을 찾기 위해. 손과 머리를 동시에 활용해 직관적으로 문제에 접근하고, 논리와 감성을 오가며 해결책을 모색한다. 민구홍 매뉴팩처링에서의 엉망진창은 유연한 대응을 요구한다. 때로는 그것을 받아들이고, 때로는 그것을 변형하고, 때로는 그것을 완전히 새로운 무언가로 재구성하며.

이 시공간의 내게 해주고픈, 또는 이 시공간의 내가 듣고픈 말은?

느낌표의 순간을 소중히 여기되 그 직관을 실현하는 과정에서의 꾸준함도 잊지 말기를. 내 손과 머리가 만드는 작품이 세상에 나가는 순간 내 손을 떠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그 분리의 과정을 통해 새로운 창조의 여지를 만들기를. 시나 소설처럼 함축적이고 다층적인 작업을 할 때 그 모호함이 때로는 가장 선명한 메시지가 될 수 있음을 알기를. 파란색이 지닌 무한한 깊이처럼 내 작업도 표면적 완성 너머의 깊이를 품기를. TXT 파일처럼 단순하고 근본적인 형태가 지닌 힘을 믿기를. 인턴과의 관계에서 내가 전수자이자 학습자가 되는 이중적 경험을 통해 나 자신의 작업 방식을 새롭게 이해하는 기회를 얻기를. 무엇보다 즉흥성이 나를 이끄는 순간, 그것을 의심하지 말고 따라보기를. 즉흥적 선택이 모여 결국 가장 나다운 결과물을 만들어낸다는 것을 기억하기를.

“민구홍과 민구홍 매뉴팩처링을 전환하는 스위치는 저도 모르는 사이 수없이 작동합니다. 하지만 모든 것을 완벽하고 깔끔하게 편집할 수 없다는 불완전함이 편집이라는 행위를 더욱 가치 있게 만든다고 생각합니다.”


각 시공간을 전환하는 스위치가 있다면?

평일 아침 7시 스마트폰 알람이 울리는 순간 집에서 회사로 전환하는 스위치가 작동한다. 그 소리는 그저 신호음이 아니라 내 정체성의 전환을 알리는 의식과도 같다. 잠에서 깨어나는 생물학적 변화와 함께 정신적으로도 사적 영역에서 공적 영역으로 이동한다. 눈을 뜨는 그 짧은 순간 하루의 일정을 머릿속으로 그리며, 어떤 민구홍이 될지 결정한다. 때로는 이 전환이 매끄럽게 이뤄지지 않고 집의 감각이 회사로 함께 따라오기도 한다. 회사에서 민구홍 매뉴팩처링으로의 전환은 폴더를 닫고 다른 폴더를 여는 행위로 이뤄진다. 일종의 디지털 의식이다. 물리적으로는 같은 공간에 머물지만 스크린 너머의 완전히 다른 세계로 이동하는 경험. 하나의 폴더가 닫히는 순간, 그곳에 담긴 프로젝트, 책임감, 역할이 함께 접히고, 새 폴더가 열리면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 물론 이 전환의 경계가 점점 더 모호해지고 있음을 느낄 때가 있다. 민구홍 매뉴팩처링에서 「새로운 질서」로의 이동은 웹 브라우저에서 탭을 전환하는 것으로 가능하다. 가장 빈번하면서도 가장 미묘한 스위치. 클릭 한 번으로 완전히 다른 맥락과 정체성으로 이동한다. 이 전환은 너무나 쉽고 즉각적인 까닭에 이따금 두 시공간 사이의 경계가 지워진다. 민구홍 매뉴팩처링의 작업 방식이 「새로운 질서」의 교육 방식에 영향을 미치고, 반대로 「새로운 질서」에서의 질문이 민구홍 매뉴팩처링의 제품에 영감을 주기도 한다. 이런 전환이 자연스러워진다는 건 어쩌면 내가 다중적 정체성을 지닌 존재임을 깨닫는 증거일지 모른다. 시간이 지날수록 전환 자체보다 전환의 질에 더 주목하게 된다. 얼마나 부드럽게, 얼마나 완전하게, 얼마나 의미 있게 한 시공간에서 다른 시공간으로 이동하는지. 결국 각 스위치들은 기능적 장치가 아니라 내 존재 방식의 핵심적 요소가 된다.

가장 애착이 가는 시공간은?

당연히 집, 그 가운데 특히 침대다. 오직 잠을 위한 1평 남짓한 공간이다. 내게 잠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하루 스물네 시간 가운데 여덟 시간은 할애한다. 나머지 열여섯 시간 가운데 여덟 시간은 생활에, 나머지 여덟 시간은 일에. 공평한 공식이다. 내게 하루는 아침이 아니라 전날 밤 충분히 만끽한 잠에서 시작한다. 매일 밤 우리는 잠을 통해 작은 죽음을 경험하고, 아침에 다시 태어난다. 그런 의미에서 침대는 나라는 정체성의 연속성을 유지하는 앵커 포인트다. 네 가지 시공간을 오가며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는 와중에도 잠이라는 원초적 경험은 변함없이 나를 나로 만든다. 인간으로서 우리는 깨어 있는 시간에 주목하고, 깨어 있음을 생산성과 연결 짓곤 한다. 하지만 내게 잠은 수동적인 휴식이 아니라 적극적인 창조의 시간이다. 꿈이라는 무의식의 작업실에서 낮에는 생각지 못한 하이퍼링크가 만들어진다. 때로는 침대에 누워 반쯤 잠들었을 때 가장 선명한 무언가가 떠오르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침대는 네 가지 시공간 가운데 가장 생산적인 시공간일지 모른다. 다른 시공간이 정체성의 외적 표현이라면, 침대는 그 모든 표현의 원천이 되는 내적 정체성을 지키는 성소다. 쉼 없이 변화하는 세상에서 변함없이 나를 품어주는 마지막 안식처.

가장 노력이 필요한 시공간은?

회사. 내게 노력이라는 말은 대개 마주하고 싶지 않은 상황과 어울리곤 한다. 회사라는 시공간이 노력을 요구하는 것은 회사의 목표와 가치가 내 목표와 가치와 완전히 일치하지 않는 까닭이다. 조직의 구성원으로서 때로는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일도 해야 하고, 내가 고수하는 방식보다 비효율적인 방식을 따라야 할 때도 있다. 이런 불일치를 조율하는 과정이 결국 노력이다. 노력은 에너지를 변환하는 일이기도 하다. 외부에서 부여된 과제를 내부의 동기로 전환하는 과정. 이 변환이 원활하게 이뤄질 때 노력은 고통과 조금 멀어진다. 하지만 이 변환이 어렵거나 불가능에 가깝거나 불가능할 때 노력은 소진과 소외로 이어진다. 그런 점에서 회사에서의 노력은 끊임없는 자기 조율과 의미 찾기의 과정이다. 이런 복잡한 심리적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점에서 회사는 가장 많은 노력이 필요한 시공간이다. 매일 스마트폰 알람으로 자신을 다른 자신으로 전환해야 하는 현대인 대부분의 숙명이기도 하다.

각 시공간마다 자신을 위한 전략이 있는가?

각 시공간마다 내가 움직이기 편한 반경이 있다. 이를 위해 나 스스로를 편집할 수밖에 없다. 예컨대 집에서는 ‘비움’의 전략을 택한다. 스케줄과 의무에서 벗어나 자연스러운 리듬을 따른다. 회사에서는 ‘구조화’의 전략이 필요하다. 업무를 명확히 정의하고, 우선 순위를 정하고, 시간을 효율적으로 관리하는 것. 「새로운 질서」에서는 ‘호기심’의 전략을 활용한다. 모든 것에 의문을 품고, 새로운 연결점을 찾아내는 것. 민구홍 매뉴팩처링에서는 ‘실험’의 전략을 추구한다. 결과에 대한 부담 없이 다양하게 시도해보는 것. 각 전략들은 서로 충돌하기도 한다. 회사의 전략은 민구홍 매뉴팩처링의 전략과 상충할 수도 있고, 집의 전략은 「새로운 질서」의 전략과 긴장 관계에 놓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충돌은 그 자체로 에너지의 원천이 된다. 서로 다른 전략 사이의 마찰이 무언가를 일깨우는 것. 결국 내 전략은 이런 다양한 전략 사이에서 균형을 찾는 것, 그리고 필요에 따라 유연하게 전환하는 능력을 키우는 게 아닐까?

당신에게 편집이란?

내게 편집은 미켈란젤로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Michelangelo Buonarroti)가 말한 조각과 비슷하다. “모든 돌덩이는 이미 조각상을 품고 있다. 나는 대리석에서 천사를 보았고, 내가 그를 자유롭게 할 때까지 조각했다.” 즉, 이미 존재하는 것에서 이미 존재하는 무언가를 발견하는 일이다. 때로는 덜고, 때로는 더하면서. 그러다 보면 뭔가 새로운 것 또는 새로운 것처럼 보이는 게 만들어진다. 그런 의미에서 편집은 곧 창작과 다르지 않다. 한편, 편집은 일종의 대화다. 원본 텍스트와 대화하고, 독자와 대화하고, 궁극적으로는 내 안의 다른 자아와 대화하는 일. 편집에 임하는 순간만큼은 내가 완전히 나로부터 분리돼 다른 누군가가 된 듯한 경험을 하기도 한다. 그리고 편집이 끝나면 다시 원래의 내가 된다. 그런 의미에서 편집은 일종의 영적 수행에 가깝다.

“모든 생산 활동의 기저에는 어떤 대상, 나아가 자기 자신을 소개하고픈 욕망이 있습니다.”

우리는 당신에 관해 묻지 않으면서 당신에 관해 묻는다. 당신에 관해 이야기하지 않으면서 당신을 이야기하는 형식이 있다면?

하이퍼링크 아닐까? 웹과 함께 대중화한 하이퍼링크는 어떤 대상과 어떤 대상을 연결하는 기술이다. 하이퍼링크는 구구절절 이야기하기보다 연결하는 행위 그 자체로 이야기한다. 하이퍼링크의 매력은 간접성에 있다. 직접적으로 무언가를 말하지 않지만, 연결을 통해 맥락과 의미를 전달한다. 누군가의 북마크나 방문 기록을 보면, 그 사람에 대해 많은 것을 알 수 있는 것처럼. 실제로 내가 만든 웹사이트나 내가 연결하는 하이퍼링크는 모두 나에 관한 암시적 진술이다. 내가 무엇에 가치를 두는지, 무엇에 관심이 있는지, 어떤 미학적 취향을 지녔는지 등을 드러낸다. 하이퍼링크는 비선형적 서사를 가능하게 한다. 정해진 순서나 위계 없이 독자가 자신만의 경로를 만들어갈 수 있다. 이런 열린 구조는 현대적 정체성과 맞닿아 있다. 고정되고 단일한 자아가 아닌 맥락에 따라 다양하게 구성되는 유동적 자아. 우리는 하이퍼링크처럼 다른 것과의 관계 속에서 정의되는 존재인지 모른다.

지금 우리는 어떤 시공간에 둘러싸인 민구홍과 이야기하는 걸까?

모든 시공간을 아우르는 민구홍 아닐까? 때로는 연약하고, 때로는 명확하고, 때로는 즉흥적이고, 때로는 답변을 하기보다 질문만 하고픈. 그런 점에서 이 인터뷰는 다섯 번째 시공간을 만들고 있는지 모른다. 일상의 흐름에서 잠시 벗어나 자신을 객관화하고 성찰하는. 이 시공간에는 다른 네 가지 시공간의 민구홍이 모두 공존한다. 집의 취약함, 회사의 명확함, 「새로운 질서」의 질문, 민구홍 매뉴팩처링의 즉흥성이 뒤섞인 복합적 자아. 인터뷰라는 관찰 행위를 통해 어떤 민구홍이 구체화된다. 하지만 여전히 그 경계는 유동적이다. 질문에 따라, 순간에 따라 다른 측면이 드러나거나 물러난다. 어쩌면 이 다섯 번째 시공간이야말로 진짜 민구홍에 가까울지 모른다. 결국 모든 측면이 투명하게 드러나고, 서로 충돌하고, 조화를 이루는 과정 자체가 ‘나’의 본질 아닐까?

민구홍 매뉴팩처링 웹사이트의 「자주 하는 질문」(https://minguhongmfg.com/faq)을 읽다가 창 크기를 늘리는 순간 좌표를 잃어버렸다. 어느새 읽던 문장을 또 읽는 나를 발견했다. 타인의 이야기를 듣는 일도 비교적 그렇다. 좌표는 놓치기 마련이고, 이야기는 반복되고, 나는 갈피를 찾을 수 없다. 행여 놓쳤을 법한, 하지만 반드시 해야 하는 말은?

집을 포함한 어떤 시공간에서든 크든 작든 육체적이고 정신적인 에너지가 필요하다. 본디 인간이라는 동물의 자연 수명은 38년이라 한다. 나는 어느덧 38년 하고도 2년을 더 살았다. 남은 생은 그저 덤, 즉 보너스 스테이지다. 그렇게 오해해보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그러려니…” 하면서. 그런 점에서 ‘그러려니’만큼 내게 에너지를 주는 말은 없는 것 같다. 체념이나 무심함이 아닌 모든 가능성을 좋음과 나쁨, 슬픔과 기쁨 등으로 나누기보다 그저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게 한다는 점에서. 그게 불교에서 이야기하는 카르마(Karma), 즉 업보를 없애는 길이기도 하고. 어쩌면 네 가지 시공간에 관한 이야기는 결국 삶의 유한함에 대한 대응 방식일지 모른다. 시간과 공간을 구획하고, 그 안에서 다른 자아를 실험하는 것. 그리고 그 실험이 끝나면 다시 처음 자리로 돌아오는 것. 모든 여행이 결국 귀향을 위한 것이듯 모든 분리는 결국 통합을 위한다. 네 가지, 또는 그 이상의 시공간을 오가는 민구홍은 이 우주에서는 결국 하나니까.

나, 즉 ‘민구홍’은 누구인가?

우연히 한국인 부모 사이에서 1985년 3월 5일에 태어나 우연히 ‘민구홍’이라는 이름을 부여받았고, 40년 가까이 그 이름으로 불린다. 다섯 살 무렵 정식으로 몬테소리 교육을 받았다. 일곱 살 무렵 처음 컴퓨터를 접하고, 열한 살 무렵 사랑하는 친구를 위해 처음 웹사이트를 만들었다. 중앙대학교에서 문학과 언어학을, 미국 시적 연산 학교(School for Poetic Computation, SFPC)에서 시적 연산을 공부했다. 안그라픽스와 워크룸에서 편집자, 디자이너, 프로그래머 등으로 일한 한편, (『레인보 셔벗』 향기를 풍기는) 1인 회사 민구홍 매뉴팩처링(https://minguhongmfg.com)을 운영하며 미술 및 디자인계 안팎에서 활동한다. ‘현대인을 위한 교양 강좌’를 표방하는 「새로운 질서」(https://neworder.xyz)에서 ‘실용적이고 개념적인 글쓰기’의 관점으로 코딩을 이야기하고 가르친다. 지은 책으로 『새로운 질서』가, 옮긴 책으로 『새로운 그래픽 디자인 교육 과정』, 『이제껏 배운 그래픽 디자인 규칙은 다 잊어라. 이 책에 실린 것까지.』, 『세상은 무슨 색일까요?』, 『개들도 우리와 똑같아요』, 『연주회』, 『선물』 등이 있다. 2022년부터 안그라픽스 랩(https://lab.ag.co.kr) 디렉터로 일하며 서울시립미술관,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 대한항공 등과 협업하는 한편, 2024년 두루두루 아티스트 컴퍼니의 친구로서 혁오, 선셋 롤러코스터, 장기하 등과 협업하기도 했다. 주말에는 취미 삼아 작곡과 번역에 심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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