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네 시 무렵 민구홍 매뉴팩처링 앞으로 이메일 한 통이 도착했다. 민구홍 매뉴팩처링에 기술 지원을 부탁하는 내용일 것이다. 회사를 소개하는 행사를 마련하고 싶다는 내용이거나 답장을 기대하지 않는 연애편지일 가능성 또한 있다. 하지만 아직은 알 수 없다. 사안이 아무리 중요하거나 시급하더라도 회사에서는 소정 근로 시간으로 정해진 평일 오전 열 시와 오후 일곱 시 전후에 도착한 이메일은 열람조차 하지 않는다. 일종의 사규다. 소정 근로 시간 전후에는 그 시간만의 논리가 필요하다. 따라서 이메일을 발송한 쪽은 기관이든, 단체든, 기업이든, 개인이든, 사안의 규모나 목적과 무관하게 답장을 받기까지 적어도 여섯 시간은 기다려야 할 것이다. 답장은 하루 또는 이틀, 어쩌면 사안이 유효성을 잃거나 누군가 자신의 사망 신고서를 작성한 뒤에야 도착할지 모른다. 답장을 기다리는 동안 할 수 있는 일은 무궁무진하다. 하지만 지금은 새벽 네 시 무렵이고, 민구홍 매뉴팩처링에서는 답장을 받고픈 욕망을 잠시 억누른 뒤 잠에 빠져보는 쪽을 권한다. 악몽 속을 헤매더라도 잠에서 깨어나면 고단함은 어느새 추억 속에 놓이고, 정신은 어제보다 조금 더 맑아질 것이다. 게다가 오전 열 시와 오후 일곱 시 사이에 시작된 이야기는 맑아진 정신처럼 조금 더 분명해질 것이다.
[캡션] 국립현대미술관은 오전 열 시부터 오후 여섯 시까지 운영되고, 이야기는 오전 열 시와 오후 일곱 시 사이에 시작된다.
그들의 이름은 각각 안정주와 전소정이었다. 자신이 결정하지 않았음에도 밝혀야 할 대상이 있다. 머리를 긁적이더라도 이야기를 올바르게 시작하려면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미술가로 활동하는 그들은 현재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소개할 작품을 구상 중이었다. 작품에서 유일하게 결정된 것은 ‘기계 속의 유령(The Ghost in the Machine)’이라는 제목이었다. 그들이 결정한 수많은 대상 가운데 하나겠지만, 이 또한 아직 가제에 머물러 있었다. 그들은 작품이 일차적으로는 유령, 즉 인공지능으로 작동하는 드론의 눈으로 기계, 즉 국립현대미술관과 밤섬을 들여다보는 시도가 되기를 바랐고, 이를 보조하기 위해 대형 모니터, 필름, 비계(scaffold), 공기주머니, 스피커, 테이프, 어항, 기포기 등 몇 가지 연극적인 장치를 마련할 예정이었다. 한편, 작품과 관람객 사이에는 그물망이 놓이고, 그물망은 작품을 보호하는 동시에 작품과 관람객을 분리해 관람객의 욕망과 행복을 제한할 것이다. 따라서 관람객은 작품에 가까이 다가갈 수 없고, 그저 드론의 시점을 따라야 한다. 즉, 드론은 관람객의 대리자 또는 움직이는 소형 미술관, 나아가 관람객은 자신이 감지하지 못하는 사이에 드론 자체가 되는 국면을 구축하는 일이 작품의 숨은 의도였다. 물론, 가제가 제목으로 탈바꿈해 권위를 획득하기 전까지 그들의 구상과 예정, 의도는 비현실에 머물 것이다.
그들에게는 구상을 실체화하기 위한 또 다른 두 가지 기계가 필요했다. 하나는 ‘민구홍 매뉴팩처링’이라는 기계였다. 그들은 2015년 느닷없이 설립된 회사의 성공과 실패, 진술과 번복을 지켜봐왔으며 지금 민구홍 매뉴팩처링이 왜 기계인지, 또는 기계일 수 있는지 10여 쪽짜리 계약서를 겸한 문서를 통해 설명했다. 문서의 판형은 A4, 즉 가로세로 210, 297밀리미터, 본문 글자 크기는 3.5밀리미터, 사방에서 본문을 둘러싼 여백은 하단에 지정된 27밀리미터를 제외하고 모두 18밀리미터였다. 문서는 형식적으로 흠결이 없었다. 마이크로 타이포그래피에 도저하게 심취한 그래픽 디자이너의 솜씨를 거친 게 분명했다. 하지만 개조식으로 정리된 문장들은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듯했으나 하나하나 뜯어보면 즉흥적인 구석이 있었고, 일부는 기계 또는 그들과 가까운 큐레이터만이 이해할 수 있을 법한 암호문처럼 보이기도 했다. 문서 중간중간 이해를 돕기 위해 삽입한 도판들은 플레이스홀더(placeholder)에 가까웠다. 그럼에도 문서의 마지막 쪽에서 본문 글자의 75퍼센트 크기, 즉 2.625밀리미터로 각주 처리한 기계의 목적만큼은 분명했다. 그들이 새벽 네 시 무렵 민구홍 매뉴팩처링 앞으로 이메일을 전송한 가장 중요한 이유이기도 했다. 기계, 즉 민구홍 매뉴팩처링은 그들의 작품을 또 다른 기계, 즉 웹사이트로 치환하고, 그들은 그저 그 과정을 지켜보기를 바랐다. 구상을 실체화하기 위해 그들 스스로 유령의 시점을 체험할 필요가 있었다. 단, 웹사이트는 국립현대미술관 공식 웹사이트를 참조해야 했다. 문서는 영국의 수학자 겸 컴퓨터 과학의 선구자 앨런 튜링(Alan Turing)의 말로 마무리됐다. “질문은 다음과 같다. ‘과연 기계가 생각할 수 있는가?’ 나는 이 질문에 대해 토론할 가치도 없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작업에 필요한 예산은 미술관에서 정한 바에 따라 지원하고, 어떤 방식으로든 미술관에서 회사를 소개할 기회까지 제공하겠다고 덧붙였다. 예산은 적지 않았다. 예산에는 작업하는 동안 사용할 사무실 사용료는 물론이고, 심지어 점심과 저녁 식사뿐 아니라 그사이에 곁들일 간식 가격까지 포함돼 있었다. 회사의 입장에서 예산은 고객의 사랑과 다르지 않다. 처음에는 아무리 충분한 듯해도 결국에는 늘 부족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민구홍 매뉴팩처링에는 예산만큼 여러 방식으로 회사를 소개하는 일 또한 중요하므로 기계로서 또 다른 기계를 생산하는 조건으로는 나쁘지 않았다.
국립현대미술관 지하에 마련된 사무실은 높이 10미터, 너비 10제곱미터의 정육면체 공간이었다. 국군기무사령부 시절 사용된 벙커로, 2018년 기관이 해체되는 과정에서 관련 문서가 소각돼 정확한 사용 목적은 알 수 없었다. 사무실과 마주하기 위해서는 관계자의 안내에 따라 곰팡내가 피어오르는 계단실을 오르내리고, 신원 확인이 필요한 제한 구역을 몇 차례 지나야 했다. 흰색 유광 페인트로 빈틈없이 도색된 사무실 중앙에는 업무용으로 설계된 책상과 의자가 놓여 있었다. 그 주위를 인공지능으로 작동하는 드론이 비행하고 있었고, 천장의 각 모서리에는 CCTV 카메라가 설치돼 있었다. 총 다섯 개의 눈이 기계가 또 다른 기계를 생산하는 과정을 지켜볼 것이다.
[캡션] 러시아 출신 미국의 SF 소설가 아이적 애지머브(Isaac Asimov)는 종이책을 사용하는 사람의 뜻에 완전히 따르는 카세트(cassette)라 주장했다. 즉, 사람이 눈을 떼면 즉시 테이프가 멈추는 카세트고, 눈길이 닿으면 즉시 테이프가 돌아가는 카세트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 기계는 손이라는 보조 장치 없이는 사실상 올바르게 작동하지 않는다. ‘진보한 종이책’인 웹사이트에서는 하이퍼링크(hyperlink) 덕에 장(page)이라는 개념은 사라지고, 손의 작동 방식은 클릭, 터치, 스크롤 등으로 세분화된다. 아이적 애지머브는 웹이 등장한 무렵인 1992년에 세상을 떠났다.
사무실 한쪽에 「민구홍 매뉴팩처링 시계」가 설치됐다. 이제 이곳에서는 민구홍 매뉴팩처링의 시간이 흐른다. 민구홍 매뉴팩처링에서는 평소와 다름없이 작업을 시작했고, 그들은 그 모습을 지켜보기 시작했다.
작업의 첫 번째 단계는 스스로를 기계화하는 것, 즉 앞으로 마주할 수많은 선택을 위한 규칙을 구축하고, 오직 규칙을 따르기로 마음먹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는 예상되는, 심지어 발생할 가능성이 작은 변수까지 고려해야 한다. 규칙에 옹색한 세칙이 끼어들 틈이 없다면, 선택에 따르는, 이유를 알기 어려운 고민은 사라지고, 우연마저 제어할 수 있게 된다. 두 번째 단계는 가제 속 ‘기계’와 ‘유령’이라는 두 가지 은유 가운데 유령보다 상대적으로 물기가 덜한 기계가 무엇인지 규정하고, 기계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이 무엇인지 파악하는 것이다. 은유의 틀을 벗어나 기계의 정체가 분명해질수록 유령이 부유할 공간은 더욱 넓어지고, 기계의 구조가 단단해질수록 유령은 더욱 흐릿해지고, 마주하는 사람에 따라 이따금 기괴하게 느껴질 것이다. 이 단계에서 규정한 바는 뒤이은 단계를 관통한다. 세 번째 단계는 두 번째 단계의 결과물을 참고해 콘텐츠(content)를 목록화하고, 각 항목에서 유의미한 개념과 수치를 산출해 정리하는 것이다. 콘텐츠에 문제가 없다면, 그게 시 한 편일지라도, 모든 콘텐츠는 무리 없이 목록화할 수 있다. 이 단계에서 무의미한 글자와 이미지는 정보에 가까워지고, 뒤이은 단계에 활용된다. 네 번째 단계는 웹을 이루는 가장 기초적이고 기본적인 컴퓨터 언어인 HTML(HyperText Markup Language)를 이용해 세 번째 단계의 결과물, 즉 목록에 새로운 질서, 즉 맥락(context)을 부여하는 것이다. 1990년 무렵 웹과 함께 등장한 HTML 덕에 텍스트는 초(超)텍스트(hypertext)화될 수 있다. ‘홈페이지’라는 어휘에서 감지할 수 있듯 웹사이트를 만드는 일은 흔히 건축으로 비유되곤 한다. HTML은 개념적으로 건축물의 공간과 각 공간에 놓일 집기를 정하는 역할을 맡는 셈이다. 이 단계를 거치면 뒤이은 단계에서 각 요소를 모듈(module) 또는 컴포턴트(component)로서 제어할 수 있다. 단, 이 단계에서 섣불리 결과물의 모습을 한정 짓는 우를 범할 수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 다섯 번째 단계는 CSS(Cascading Style Sheets)를 이용해 네 번째 단계의 결과물에 새로운 질서, 즉 스타일(style)을 부여하는 것이다. 여기서 ‘스타일’은 마이크로 타이포그래피뿐 아니라 매크로 타이포그래피, 애니메이션을 아우른다. 이 단계에서 웹사이트는 손에 잡힐 듯 가시화하기 시작한다. 스타일을 부여하는 데 필요한 각종 수치와 단위는 세 번째 단계에서 정리한 정보를 참고할 수 있다. 여섯 번째 단계는 다섯 번째 결과물에 적합한 기능(function)을 추가하는 것이다. 물론, 다섯 번째 단계만으로 콘텐츠를 소개하는 데 무리가 없다면 이 단계는 필수가 아니다. 마지막 단계는 웹사이트 어딘가, 되도록 눈에 잘 띄는 위치에 국립현대미술관 로고를 삽입하는 것이다. 로고는 가제가 제목의 권위를 획득한 뒤, 권위에 권능을 부여할 용도다. 어쩌면 이번 작업에서 가장 중요한 단계일지 모른다.
미국의 소설가 커트 보니거트(Kurt Vonnegut)는 소설 『챔피언의 아침(Breakfast of Champion)』을 위해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문장을 생성했다. “나는 나 자신뿐 아니라 인간에게도 신성한 것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우리는 모두 기계이며, 충돌하고 충돌할 운명이다. 이보다 더 나은 방법이 없기에 우리는 충돌의 팬이 됐다.” 앞선 여섯 단계가 기계 부품처럼 서로 맞물려 있듯 각 문장의 순서가 바뀐다면 의미는 올바르게 전달되지 않을 것이다. 인공지능으로 작동하는 드론이 반려동물처럼 키보드 위에 머물기도 하는 사이 웹사이트는 완성됐다. 어딘가에서 마주한 듯한 웹사이트는 그 자체로 기계였지만, 국립현대미술관 웹사이트에 놓인 국면에서는 유령처럼 작동했다. 인공지능으로 작동하는 드론처럼 미술관 웹사이트의 너비와 높이를 파악해 부유하며 사용자가 클릭하거나 터치하거나 스크롤하기를 유령은 기다린다. 기계가 또 다른 기계를 생산하는 과정은 빠짐없이 녹화돼 저장됐다. 유령은 그저 보기만 할 뿐 말이 없는 법이다. 유령의 시점을 체험한 끝에 그들은 구상을 실체화하고, 비로소 가제에 제목의 권위를 부여할 수 있었다.
[캡션] 어딘가에서 마주한 듯한 웹사이트는 그 자체로 기계였지만, 국립현대미술관 웹사이트에 놓인 국면에서는 유령처럼 작동했다. 유령은 인공지능으로 작동하는 드론처럼 미술관 웹사이트의 너비와 높이를 파악해 부유하며, 사용자가 클릭하거나 터치하거나 스크롤하기를 기다린다. 웹사이트는 테스트 기간을 제외하고는 외부에 공개되지 않았다. 독자는 웹사이트의 실체를 자신의 경험에 따라 상상할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