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n Guhong Manufacturing

New Order: Yesterday, Today, and Tomorrow

2023

‘현대인을 위한 교양 강좌’를 표방하는 「새로운 질서」는 2016년 크리스마스 이튿날 그래픽 디자인 스튜디오 겸 출판사 워크룸에서 열린 비공개 워크숍에서 비롯했다. ‘문서를 문서로’라는 제목으로 열린 이 워크숍에서 참여자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책을 한 권 골라 자신이 좋아하는 지면을 한 페이지짜리 웹사이트로 치환했고, 이 과정에서 오프라인 출판물, 즉 종이 책과 온라인 출판물, 즉 웹사이트가 어떻게 같고 다른지 체험했다. 어쩌다 시작하게 됐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돌이켜보면 이 워크숍이 「새로운 질서」를 이루는 씨앗 가운데 하나가 된 점 만큼은 분명하다.

2019년, 곳곳에 흩어진 씨앗을 모아 한 시간 동안 읽기 적당한 분량으로 간추린 『새로운 질서』(미디어버스)가 출간됐고, 같은 해 권순우, 김동희, 돈선필, 박현정 등 젊은 미술가들이 운영하는 스튜디오 파이취미가의 아낌없는 지원에 힘입어 「새로운 질서」는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강좌가 열리는 금요일은 ‘새로운 질서의 날’로 불리며 참여자, 즉 ‘새로운 질서의 친구들’은 웹을 이루는 기본적인 컴퓨터 언어인 HTML(HyperText Markup Language), CSS(Cascading Style Sheets), 얼마간의 자바스크립트(JavaScript, JS)를 익혀 자신만의 웹사이트를 만들었다. 「새로운 질서」에서는 컴퓨터 언어를 다루는 일, 즉 코딩(coding)을 ‘실용적이고 개념적인 글쓰기’의 관점으로 바라본다. 이는 은유나 환유와는 거리가 멀다. 세련된 툴바와 아이콘에서 벗어나 커서가 깜박이는 텍스트 에디터상에서 이뤄지는 코딩이 글쓰기와 전혀 다르지 않은 까닭이다. 그렇게 3년여 동안 파주타이포그라피배곳(2018~21년)과 홍익대학교(2022년) 등 기존 교육 시스템과 어깨동무하며 커리큘럼이 조금씩 다듬어졌고, 2023년 현재까지 300여 명에 이르는 ‘친구들’이 「새로운 질서」를 거쳐갔다. 이제 그들은 자신의 욕망에 따라 생활 속에서 컴퓨터 언어를 활용한다. 이 가운데는 자신도 미처 모르던 솜씨를 깨달아 전공이나 직업을 바꾸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새로운 질서 그 후…’‘어떤 질서’ 같은 컬렉티브 겸 스터디 그룹이 조직되기도 했다.

처음부터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새로운 질서」에서는 2015년 캐나다의 미술가 [J.R. 카펜터](J. R. Carpenter, http://luckysoap.com)가 주창한 ’핸드메이드 웹’(Handmade Web)을 주요한 해시태그로 삼는다. “사람들은 적극적으로 자신만의 웹사이트를 만들어야 한다. 특히 오늘날 소셜 미디어 밖에서 자신만의 웹사이트를 만드는 일은 느닷없이 급진적인 일이 됐다. ‘핸드메이드 웹’은 이를 격려하기 위해 내가 고안한 어휘다.” 나는 이 어휘를 2016년 미국 시적 연산 학교(School for Poetic Computation, SFPC)에서 수학하던 시절 처음 접했다. 미국의 시인이자 MIT(Massachusetts Institute of Technology) 교수인 닉 몽포르(Nick Montfort)의 수업에서였을 것이다. 핸드메이드는 대개 기계가 아닌 손이나 단순한 도구를 이용해 만든 물건을 가리킨다. 물건의 양상은 다양하다. 아주 느슨하기도 하고, 아주 정교하기도 하다. 핸드메이드 웹은 기업이 아닌 개인이 만들어 유지하는 웹사이트, 얼핏 무용해 보이는 웹사이트, 읽기, 쓰기, 디자인, 소유권, 개인 정보 보호 등과 관련한 관습에 도전하는 웹사이트를 둘러싼 웹의 한 국면이다. 핸드메이드 웹의 역사는 월드 와이드 웹(World Wide Web) 초창기인 199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에는 웹 기술 또한 초기 단계였으므로 웹사이트는 대개 수작업으로 만들어졌다. 미리 마련된 템플릿이나 웹사이트 빌더 같은 개념은 존재하지 않았다. 기술적인 제약은 분명했지만, 오히려 그 덕에 제약 속에서 제약을 활용해 제약을 뛰어넘는 시도가 이뤄지며 다양한 웹사이트가 만들어졌다. 물론 모든 웹사이트가 ‘훌륭’하다 말할 수는 없지만, 재미있고, 기발하고, 흥미롭고, 무엇보다 자신감이 넘쳤다. 2000년대 초 소셜 미디어를 앞세운 웹 2.0이 도래하기 전까지 웹은 그 자체로 핸드메이드 웹이었고, 그 정신은 오늘날까지 즐겁게 고스란히 이어진다. 요컨대 핸드메이드 웹은 노스탤지어라기보다는 오늘날 지나치게 빠르고, 크고, 상업화한 웹을 향한 저항 어린 경쾌한 질문이다.

시적 연산 학교의 마지막 수업은 ‘자신이 운영하고픈 학교 만들기’였다. 수업을 진행한 최태윤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수업에서 제안한 학교가 여러분이 사는 동네와 나라에서 운영되기를 바랍니다. 언젠가 시적 연산 학교가 사라진 뒤에도 말이죠.” 수업은 허드슨강 옆에 자리한 공원에서 세 시간 동안 진행됐다. 내가 제안한 학교는 ‘리코타 인스티튜트’(Ricotta Institute, RI)였다. 리코타 인스티튜트의 커리큘럼은 리코타를 중심으로 4주에 걸쳐 진행된다. 학생은 첫째 주에 리코타를 만든다. 둘째 주와 셋째 주에 자신이 만든 리코타에 관해 안내문을 비롯해 소설, 시 등 여러 형식으로 글을 쓰고, 그 결과물을 웹사이트로 치환한다. 넷째 주에 웹사이트를 이용해 자신이 만든 리코타를 판매한다. 이는, 지금도 그렇지만, 요리를 비롯해 코딩을 포함한 글쓰기, 마케팅, 나아가 브랜딩이 오늘날 나를 포함한 현대인이 갖출 만한 덕목이라 생각한 까닭이다. 수업이 끝난 뒤 한 친구는 내게 왜 하필 리코타인지 물었다. 내 답변은 다음과 같았다. “리코타는 맛있고, 건강에 좋고, 무엇보다 아주 하얗잖아.” 생각건대 「새로운 질서」는 어쩌면 언젠가 문을 열 리코타 인스티튜트를 위한 베타 테스팅일지 모른다.

어떤 대상을 좋아하고, 급기야 사랑하게 되면 그 아름다운 마음을 주위와 나누고 싶게 마련이다. 내게 「새로운 질서」는 그 일을 실천하는 여러 방법 가운데 하나다. 「새로운 질서」의 궁극적인 목적은 핸드메이드 웹의 정신을 되살려 웹을 이루는 기본적인 컴퓨터 언어를 통해 웹사이트를 만드는 기술을 익히는 것보다 이를 통해 자신을 향한 사랑을 확장하고 주위와 나누는 데 있다. 자신을 도저하게 사랑할 수 있다면, 남 또한 도저하게 사랑할 수 있지 않을까?

다음은 인터넷과 웹을 둘러싼 몇 가지 사건을 정리한 연대기인 한편, 「새로운 질서」의 어제와 오늘과 내일을 얼마간 더듬어볼 수 있는 징검다리다. 누군가에게는 어딘가 부족할지 모르지만, 오히려 그가 「새로운 질서」에 찾아와 징검다리에 또 다른 돌을 놓는 데 함께하기를 바란다면 지나친 기대일까. 어쨌든 시작은 1989년이다.


1989년, 스위스 바젤의 유럽 입자 물리 연구소(Organisation Européenne pour la Recherche Nucléaire, CERN, https://home.cern)의 컴퓨터 과학자 팀 버너스리(Tim Berners-Lee)가 오늘날 ‘웹’으로 일컬어지는 월드 와이드 웹(World Wide Web)에 관한 논문인 『정보 관리: 제안』(Information Management: A Proposal)를 발표했다. 그는 여러 문서가 하이퍼링크(hyperlink)를 통해 비선형적으로 연결된 모습을 상상했다. 논문의 제목처럼 웹의 본디 정보를 관리하는 시스템으로서 연구자들끼리 논문을 효율적으로 열람하기 위한 용도였다. 즉, 웹은 인쇄물에서 비롯한 셈이다.

1990년, 팀 버너스리가 최초의 웹 브라우저 ‘월드와이드웹’(WorldWideWeb)을 공개했다. 웹 브라우저의 이름은 ‘월드 와이드 웹’과 혼동된다는 이유로 이후 ‘넥서스’(Nexus)로 바뀌었다. 웹 브라우저는 웹사이트를 열람하는 소프트웨어이자 모든 웹 기술의 종착지다. 아무리 코드가 근사하더라도 웹 브라우저 없이는 열람조차 할 수 없다.

1991년, 팀 버너스리가 최초의 웹사이트(http://info.cern.ch/hypertext/WWW/TheProject.html)를 공개했다. 최초의 웹사이트에서 디자인은 중요한 요소가 아니었다. 팀 버너스리는 흰색 배경, 검정 글자, 밑줄이 그어진 파란색 하이퍼링크를 통해 우아하고 익살스러운 어조로 웹을 소개했다. 하지만 당시 이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 사람은 웹 브라우저를 사용할 수 있는 팀 버너스 리와 그의 동료들뿐이었다. 이 웹사이트가 동작하는 서버(server)는 스티브 잡스(Steve Jobs)가 설립한 넥스트 컴퓨터(NeXT Computer)의 넥스트큐브(NeXTcube)였다.

1992년, 도서관 사서인 진 아머 폴리(Jean Armour Polly)가 ‘웹 서핑’(web surfing)이라는 용어를 제안했다. 그 뒤 사람들은 웹을 마주할 때 정보가 파도치는 바다를 상상했다. CERN의 컴퓨터 과학자 실바노 데 제나로(Silvano De Gennaro, https://venus.web.cern.ch/home_pages/silvano.html)가 연구소의 직원으로 이뤄진 패러디 팝 그룹인 ‘레 조리블레 세르넷’(Les Horribles Cernettes, https://cernettes.wixsite.com/cernettes)의 사진을 CERN 웹사이트에 게시했다. 여성 네 명이 드레스 차림으로 환하게 웃고 있는 이 사진은 웹상에 등장한 최초의 사진으로 알려져 있다.

1993년, 팀 버너스리의 요청에 따라 CERN에서 웹과 관련한 기술을 퍼블릭 도메인으로 공개했다. 이 결정이 아니었다면, 사람들은 웹을 사용하는 데 어떤 식으로든 비용을 지불해야 했을지 모른다. 그래픽 인터페이스를 갖춘 최초의 웹 브라우저 모자이크(Mosaic)의 첫 번째 버전이 출시됐다. 『뉴욕 타임즈』(New York Times)가 웹에 관해 처음으로 언급했다. “웹은 정보화 시대의 묻혀 있던 보물을 찾아내는 지도와 비슷하다.”

1994년, 포털 사이트의 형태를 처음 제시한 야후!(Yahoo, https://yahoo.com)가 문을 열었다. 2000년대 중반까지 야후!는 최고의 검색엔진이자 웹 디렉토리였다. AT&T에서 『와이어드』(Wired, https://wired.com)의 전신인 『핫와이어드』(HotWired)의 웹사이트에 최초의 배너(banner)를 공개했다. 가로세로 476, 56픽셀 크기의 배너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만 실렸다. “마우스를 클릭해본 적이 있나요? 그렇게 될 겁니다.” 배너를 접한 사람들 가운데 44퍼센트가 배너를 클릭했고, 그 뒤로 배너는 1990년대 웹 디자인을 대표하는 요소가 됐다. 전설적인 무료 웹 호스팅 서비스 지오시티(Geocities)가 문을 열었다. 지오시티는 사람들이 자신만의 웹사이트를 만들 수 있게 된 전환점이었다. 웹 브라우저 넷스케이프 내비게이터(Netscape Navigator)의 첫 번째 버전이 출시됐다.

1995년, 슬로베니아의 예술가 북 코직(Vuk Ćosić)이 ‘넷 아트’(Net Art)라는 용어를 처음 제안했다. 미국의 프로그래머 브렌든 아이크(Brendan Eich)가 자바스크립트를 공개했다. 자바스크립트 덕에 웹사이트상에서 다양한 인터랙션이 가능해졌다. 웹 브라우저 인터넷 익스플로러(Internet Explorer)가 출시됐다. 인터넷 익스플로러는 넷스케이프 내비게이터와 함께 한동안 웹 브라우저의 점유율을 양분했다. 미국 콜로라도에서 열린 한 컨퍼런스에서 ‘사용자 경험’(User Experience)이라는 용어가 처음 등장했다.

1996년, 북 코직이 최초의 넷 아트로 알려진 『첫 번째 상영』(First Screening)을 발표했다. 최초의 웹사이트의 형식을 패러디한 GIF(Graphics Interchange Format) 이미지로 구성된 이 작품은 인터넷과 웹이 예술의 매체가 될 수 있음을 제안했다. 하콤 비움 리(Håkon Wium Lie)가 웹 디자인의 초석이라 할 만한 CSS(Cascading Style Sheets)를 공개했다. CSS 덕에 콘텐츠와 디자인이 분리됐고, 글자체, 글자 크기, 글자 색을 비롯해 배경 색, 레이아웃 등 웹사이트의 요소를 전보다 유연하게 제어할 수 있게 됐다. 매크로미디어(Macromedia)에서 벡터 기반 애니메이션 소프트웨 플래시(Flash)의 첫 번째 버전을 공개했다. 미국의 시인 케네스 골드스미스(Kenneth Goldsmith)가 구체시를 비롯한 아방가르드 예술에 초점을 맞춘 아카이브 우부웹(UbuWeb, https://ubu.com)을 공개했다.

1997년, 매크로미디어에서 위지위그(WYSIWYG, What You See Is What You Get) 기반 웹사이트 제작 소프트웨어 드림위버(Dreamweaver)를 출시했다.

1998년, 구글(Google, https://google.com)이 문을 열었다. 구글은 본디 수학적 알고리즘을 사용해 관련성이 높은 검색 결과를 찾는 것을 목표로 삼는 연구 프로젝트였다. ‘페이지랭크’(PageRank)로 불린 이 알고리즘은 상호 참조를 기반으로 웹페이지 사이의 관계를 분석해 중요성을 평가했다. ‘구글’이라는 이름은 10의 100승을 뜻하는 구골(googol)의 오타였다.

1999년, 지오시티가 야후!에 인수됐다. 그렇게 탄생한 야후! 지오시티(Yahoo! Geocities)는 ‘닷컴 버블’이 꺼질 때까지 10여 년 동안 운영됐다.

2001년, 위키백과(Wikipedia, https://wikipedia.org)가 문을 열었다. ‘누구나 편집할 수 있는 웹사이트’인 위키(wiki)의 개념을 최초로 고안한 워드 커닝햄(Ward Cunningham)의 이론에 영감을 받은 결과물이었다.

2002년, 캐나다의 웹 디자이너 데이브 시어(Dave Shea, http://daveshea.com)가 CSS 젠 가든(CSS Zen Garden, https://csszengarden.com)을 공개했다. CSS 젠 가든은 CSS 전시장으로, HTML 구조는 그대로 유지한 채 CSS 파일만으로 웹사이트가 달라지는 모습에서 사람들은 CSS의 힘과 아름다움, 그리고 무한한 가능성을 실감했다.

2003년, 대표적인 콘텐츠 매니지먼트 시스템(Content Management System, CMS) 워드프레스(Wordpress, https://wordpress.org)가 출시됐다. 처음에는 글쓰기에 초점을 맞춘 블로그 엔진이었지만, 곧 웹사이트의 디자인을 쉽게 변경할 수 있는 테마 기능을 도입했다. 워드프레스 이후에도 수많은 CMS가 등장했음에도 개인 블로그에서 디자이너 포트폴리오, 대기업 웹사이트까지 오늘날 CMS를 사용하는 웹사이트 가운데 약 40퍼센트가 워드프레스로 구축된다. 워드프레스의 모토는 다음과 같다. “코드는 시다.”

2004년, ‘예술과 학문을 위한 위키’를 표방하는 모노스코프(Monoskop, https://monoskop.org)가 문을 열었다. 네덜란드의 미술가 두샨 바록(Dušan Barok)이 큐레이션한 모노스코프는 꼼꼼한 색인과 함께 희귀한 역사적 사실에 관한 자료를 제공한다.

2005년, 영국의 알렉스 튜(Alex Tew)는 『밀리언 달러 홈페이지』(The Million Dollar Homepage, http://milliondollarhomepage.com)를 공개했다. 가로세로 1,000, 1,000픽셀, 즉 100만 픽셀로 이뤄진 이 웹사이트에서 알렉스 튜는 1픽셀을 1달러에 판매했다. 호방하게 상업적인 이 웹사이트는 짧은 시간에 인기를 얻었고, 성공적인 바이럴 마케팅과 인터넷 현상의 본보기가 됐다. 마지막 픽셀은 이베이 경매에서 팔리며 알렉스 튜는 웹사이트 하나로 100만 달러를 손에 쥐었다.

2006년, ‘구글(google)하다.’라는 용어가 사전에 등재됐다. 자바스크립트 개발자 존 레식(John Resig, https://johnresig.com)이 자바스크립트를 쉽게 활용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오픈 소스 기반 라이브러리 제이쿼리(jQuery, https://jquery.com)를 공개했다. 이후 리액트(React), 뷰(Vue.js) 등 SPA(Single Page Application) 기반 라이브러리가 등장했지만, 제이쿼리의 모토는 여전히 곱씹을 만하다. “적게 쓰고, 더 많은 것을.” 그래픽 디자이너이자 작가인 대니얼 이톡(Daniel Eatok)이 제프리 바스카(Jeffery Vaska)와 개발한 CMS인 인덱시빗(Indexhibit, https://indexhibit.org)을 공개했다. 기능과 디자인에서 미니멀리즘을 강조한 인덱시빗은 특히 미술 및 디자인계에서 포트폴리오용으로 활용됐다.

2007년, 애플(Apple)에서는 첫 번째 아이폰(iPhone)을 출시했다. 세계 개발자 회의(World Wide Developers Conference, WWDC)의 전신인 맥월드(Macworld)에서 스티브 잡스(Steve Jobs)가 아이폰용 사파리(Safari)를 실행하는 순간 웹사이트는 공식적으로 데스크톱의 울타리를 벗어났다.

2008년, 구글 크롬(Google Chrome)의 첫 번째 버전이 출시됐다.

2009년, 야후!가 지오시티 문을 닫았다. 이곳에서 운영되던 수많은 웹사이트는 느닷없이 모두 사라졌다. 사람들이 자신만의 방식으로 자신을 이야기하던 자리는 소셜 미디어가 차지했다.

2010년, 아이폰에 레티나 디스플레이(Retina Display)가 탑재됐다. 그 결과 사람들은 모바일 기기에서 인쇄물만큼이나 또렷하게 글자를 읽을 수 있게 됐다. 웹 디자이너 에단 마코트(Ethan Marcotte, https://ethanmarcotte.com)가 웹진 리스트 어파트(A List Apart, https://alistapart.com)에 반응형 웹 디자인(Responsive Web Design)의 개념을 소개했다. 스티브 잡스가 애플 웹사이트의 홈페이지에 공개한 「플래시에 대한 생각」(Thoughts on Flash)은 플래시의 시대가 저무는 데 영향을 미쳤다.

2011년, 어도비(Adobe)에서 크리에이티브 클라우드(Creative Cloud)를 발표하며 구독형 서비스를 시작하며 이제껏 어도비 소프트웨어를 사용하던 사람에게는 매월 고정으로 지출되는 비용이 더해졌다.

2012년, 미디어 쿼리(Media Query)가 공식화됐다. 미디어 쿼리는 반응형 사이트를 디자인하는 데 활용되는 기본 기술 가운데 하나로, 이를 통하 모니터 화면의 해상도나 크기애 따라 웹페이지를 렌더링할 수 있다.

2013년, 카일 드레이크(Kyle Drake)가 지오시티의 정신을 계승한 네오시티(Neocities, https://neocities.org)를 공개했다. 이제 다시 사람들은 새로운 도시에서 핸드메이드 웹을 실천해간다. “네오시티는 웹을 위대하게 만든 재미, 창의성, 독립성을 되살립니다. 사람들이 자신만의 웹사이트를 만드는 창의성, 아름다움, 힘을 활용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우리의 목표입니다. 자동화와 단조로움에 갇힌 웹을 재건해 다시 재미있게 만듭시다.”


2019년 말, 전염병이 창궐하기 전부터 웹, 나아가 인터넷은 현실과 조금 더 가까워지거나 어떤 차원에서는 이미 현실을 대체했다. 자연스럽게 온라인 출판물로서 웹사이트의 역할이 도드라졌고, 그렇게 두루마리에 자리하던 콘텐츠는 코덱스(codex)를 거쳐 다시 두루마리(scroll)로 돌아왔다. 구글의 자리를 위협한다는 오픈AI(OpenAI, https://openai.com)의 채트GTP(ChatGTP, https://chat.openai.com)와 잠시 이야기를 나눠본 결과 웹사이트는 앞으로도 여전히 유용한 정보를 제공하고, 전자 상거래의 주요한 수단으로 기능할 게 분명하다. 웹사이트를 열람하는 단말기로서 스마트폰 같은 모바일 기기의 중요성은 더욱 증가할 테고, 이는 웹사이트를 기획하는 일뿐 아니라 웹사이트의 디자인과 기능을 고안하는 데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이다. 나아가 가상 현실(Virtual Reality, VR)이나 증강 현실(Augmented Reality, AR) 같은 기술과 통합돼 누구도 생각지 못한 결과물이 만들어지는 모습 또한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다. 한편, 미술 및 디자인계에서도 웹사이트는 주요한 매체로 자리매김했다. 적지 않은 전시가 온라인에서 열리는 것은 물론, 작가들은 웹사이트를 이용해 작품을 제작하고, 소개하고, 관람객과 작품을 연결한다.

동시에 웹사이트를 만드는 일은 갈수록 복잡해진다. 그럼에도 웹 기술의 피라미다 맨 밑바닥에서 다른 기술을 떠받치는 기본적인 컴퓨터 언어의 역할은 고스란하다. 로럴 슐스트(Laurel Schwulst, https://laurelschwulst.com)는 말했다. “만드는 사람에 따라 웹사이트는 무엇이든 될 수 있다. 방, 선반, 정원, 끝없이 바닷속으로 가라앉는 바위…” 웹사이트의 또 다른 역할과 가능성을 탐구하는 것은 결국 소비자를 넘어 생산자를 자처하는 개인의 몫이다. 이때 결과물이 어떤 모습이든 자신만의 콘텐츠에 새로운 질서를 부여하는 일만큼은 변함이 없다. 그 첫걸음에 「새로운 질서」가 조금이나마 이바지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2016년 크리스마스 이튿날 워크룸에서 열린 비공개 워크숍과 크게 다를 바 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