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n Guhong Manufacturing

Study of Pink

2018

내가 그곳에 가기로 마음먹은 것은 그곳에 간판이 달려 있지 않다는 소문을 듣고서였다. 그곳에 간판이 달려 있지 않다는 소문은 오래 무성했다. 소문이 무성한 곳은 대개 피하려 애쓰는 편이지만 그곳에는 한번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곳은 그야말로 소문만 무성했기 때문이다. 그곳에 관한 온갖 무성한 소문 중 가장 무성한 소문이 바로 간판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정작 그곳에 간판이 달려 있지 않은 모습을 본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곳에 가본 이가 이제껏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나는 이제껏 아무도 가본 적 없는 간판 없는 곳에 가보고 싶어진 것이었는데 그건 이를테면 이제껏 아무도 만난 적 없는 이름 없는 이를 만나러 가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아무도 그를 만난 적 없기에 그를 만나더라도 그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고 그와 만났음을 결국 알지 못한다. 애초에 그에게 이름이 없기에 그를 만나더라도 그의 이름을 부를 수 없고 그의 이름을 결국 알지 못한다. 우리는 그렇게 만나고 헤어진다. 나는 그 정도의 마음을 먹고 그곳에 가기로 했다.

어째서인지 나는 아직 가보지 못한 그곳이 익숙하게 느껴졌는데, 그래서인지 그곳에 그리 어렵지 않게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를테면 다들 크고 작은 간판들을 내걸고 있으니 그것들을 피하다 보면 자연히 아무 간판이 걸려 있지 않은 그곳에 다다르게 될 것이었다. 피하게 될 간판들을 떠올려본다. 몸집이 큰 간판은 어렵지 않게 피해 갈 수 있다. 모종의 의구심을 자아낼 만한, 과하게 근사하거나 초라한 간판도. 아무래도 선언으로 받아들여야 할 간판 또한. 그리고 암호로밖에 보이지 않는 간판. 오자를 개의치 않는 간판. 멀쩡히 뒤집힌 간판. 한참 비뚤어진 간판. 어느 날 문득 바뀐 간판. 어쩐지 시원찮은 간판. 아무런 특징을 찾아볼 수 없는 간판. 그래도 다들 어떻게든 간판이라 부를 만한 것들을 달고 있다. 내세울 것들이 있다.

나는 내세울 것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던, 혹은 그러하다고 여겨졌던 그가 불현듯 그리워졌다.

권태만큼이나 여러 형태를 지닌 피로는 공격적이다. 거리에 나서자마자 시야에 덤벼들기 시작하는 온갖 단어들이 안기는 피로가 그 증거다. 거리의 단어들은 틈마다 모여든다. 모여든 단어들이 제멋대로 조합되고, 조합된 단어들이 뒤섞이고, 뒤섞인 단어들이 곳곳에 흩어진다. 틈마다 남김없이 메운다. 거리의 밀도를 높인다. 그렇게 거리에 나선 이의 숨통을 조인다. 그것이 수년동안 바깥출입을 하지 않은 그의 논리였다.

소리를 문자로. 삶의 아이러니를 몸소 실천하듯, 거리의 단어들을 외면하는 대신 그는 매일 그에게 주어진 하루 동안 녹음된 음성 파일을 듣고 자판으로 받아 적어 문서 파일로 만들곤 했다. 음성 파일을 따라가려면 자판을 신속히 두드려야 했고 그러므로 어쩔 수 없이 속기해야 했다. 그는 일종의 속기사라 불릴 만했다. 그러나 그는 속기를 직업으로 삼은 이들을 만나본 적이 없었고 그러므로 그들의 속기 실력과 자신의 속기 실력을 비교해볼 일도 없었다.

탁월한 귀. 속기를 일삼는 이들에게 우선적으로 중요한 그것. 그는 듣기에 능했다. 들리면 뭐든 적을 수 있었다. 그는 온갖 말들을 듣고 온갖 말들을 적었다. 물론 그건 언뜻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리 어렵지 않게 해낼 수 있는 일로 보이기도 했다. 다만 그에게는 한 가지 지침이 있었다. 그는 한번 받아 적은 말을 돌아보지 않았다. 그러니까 그는 들리는 대로 적었는데, 그보다는, 적히는 대로 적었다. 혹은 들리지 않는 말들을 듣고 받아 적는지도 몰랐지만 그 점에 대해 판단하기는 쉽지 않았다. 그가 받아 적은 글들은 대개 쉽게 이해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는데, 때로는 영영 이해되지 않을 것만 같았고, 때로는 이해할 필요가 없어 보이기도, 다시 말하자면 굳이 이해하고 싶지 않기도 했다. 이를테면 변종 기호들. 나선 마침표. 산발한 편지. 음각된 벽돌. 조각 화병들. 심심풀이 보석. 나팔들의 진저리. 초록색 뼈들. 다급한 목발. 엉성한 보조 바퀴. 넝마 어스름. 어린 어른대는 유괴된 유골들의 발작 발장난. 등불 무덤. 등덤. 둥근 정령 덩어리. 둥덩. 얼루. 얼룩 신기루. 깃발, 방울, 깃울, 돌멩이, 울멩. 쇠잔한 잠꼬대. 형식적 질문과 전형적 대답. 모퉁이마다 만개한 방심. 조바심이라는 발길질. 평면 형태의 불안. 증폭되는 침. 간파된 꼬리의 비망록. 총명한 허영의 모서리와 가장자리. 두개골격어깨뼈미로. 망령의 허물. 애벌레 곤죽. 양초 진창. 지지부진한 수다. 푹신한 웃음이 잔다. 나는 무서운 하양을 태운다. 그는 속도 높여 소리를 문자로 변환했다. 속도에 취한 손가락들은 종종 글자들을 뒤섞었고 단어들을 조합했다. 뒤엉킨 단어들이 쌓여갔다. 그 둔덕 뒤에 한 사람이 은둔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그는 말들의 그림자였다.

언제나 말을, 말소리를, 목소리를, 음성을, 그는 면밀히 듣고 싶어 했고 밖에 나가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음식을 주로 만들어 먹어야 했는데 기왕이면 귀에 좋은 음식들을 택했다. 손에 좋은 음식들을 택할 수도 있었지만 어쩐지 우리는 귀를 중시했다. 들어야 쓸 수 있다고 여겼고, 그건 사실이었다. 주메뉴로는 마늘 소스를 끼얹은 돼지 목살 구이. 돼지고기에 신경 안정 효과가 있다는 사실이 반갑고도 당연하게 여겨졌다. 고기의 부위는 바뀌어도 무방했다. 물론 소스를 바꿔도 무방했는데 그 경우 마늘을 구워 곁들였다. 기타 곁들임으로는 호두와 브로콜리 볶음 또는 데친 시금치 무침. 무침 양념은 손 가는 대로. 잣을 뿌린 아스파라거스 구이도 간혹 만들었다. 신맛과 단맛을 함께 품은 과일들은 종종 후식으로 취했다. 간식으로는 밤 조림이 제격이었다. 그는 양이 많기는커녕 오히려 소식하는 편이었지만 귀에 좋다고 권하는 음식은 조금씩이라도 고루 맛봤다. 그만큼 귀를 소중히 했다.

나는 그의 귀를 자세히 들여다본 적이 있다. 정확히는 자세히 만져본 적이 있다. 그는 선선히 귀를 내줬다. 혹은 체념한 듯. 그날 만졌던 귀의 감촉이 아직 손가락에 묻어 있다. 바깥귀. 전반적으로 크다. 귓바퀴는 확실히 얇고, 상당히 세밀해 손가락 끝으로 감돌기가 쉽지 않다. 귓불은 가까스로 제 형태를 취하고 있다. 귀둘레를 지나 귀속둘레로. 귀조가비에 검지를 잠시 댄다. 이어 바깥귀길로 향한다. 손가락을 바꿔 계지를 넣는다. 계지가 반 정도 들어갈 만큼 길이 넓고, 먼지나 피지 없이 매끄러운데, 적어도 감촉으로는 그렇다. 점차 딱딱해진다. 허락된 곳은 거기까지. 가운데귀와 속귀는 기울어진 고막이 가리고 있다. 그렇게 알고 있다. 나는 망치뼈와 모루뼈와 등자뼈로 인해 직육면체 모양을 띠고 있다고 알려진 가운데귀의 고실이 궁금하지만, 어떤 것들은 궁금한 대로 남겨두어야 한다. 다만 그 방에 가득하다는 점막의 끈끈함을 상상해볼 뿐. 그리고 뼈미로, 그곳의 안뜰, 방 뒤의 방. 막미로, 공 모양의 둥근주머니와 달걀 모양 타원주머니를 보유한, 방 속의 방. 그의 방.

나는 그의 방에 목소리로만 들어갈 수 있었다.

나는 음악을 들을 줄 몰라. 어느 날 음악을 틀자 그가 답했다. 통상적으로 음악이라고 불리는 종류의 소리를 그는 그렇게 잘라냈다. 그리고 방으로 들어가 이내 자판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이전보다 다분히 빠른 속도로. 속도는 조금씩 계속 빨라졌다. 신경을 긁는,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는 종류의 소리가 방에서 흘러나왔다. 뒤틀린 속도의 소리. 나는 그 소리를 녹음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다만 귀를 기울였다. 영영 나오지 않을 것 같던 그에게. 영영 흘러나올 것 같던 소리에. 소리를 듣다 잠들었다. 그가 언제 잠들었는지는 모른 채.

전반적으로 집중력이 높은 편이었던 그는 자신의 몸을 씻는 데 고도의 집중력을 기울였고 자연히 굉장히 오래 씻었다. 하루 두 차례, 잠자리에 들기 전과 들고 난 후, 잠을 둘러싼 의식. 나는 그가 씻기를 기다리는 동안 어쩔 수 없이 지루해지곤 했고, 그럴 때 그의 개가 내 옆에 왔다. 나도 개의 옆에 가고 싶었지만 항상 개가 먼저 내게로 왔다. 개들에게는 어쩔 수 없는 일인 듯하고, 개들에게 어쩔 수 없이 미안하다. 항상.

그의 개는 물을 두려워했다. 자연히 씻기 싫어했고, 그래서 자주 씻기지 않았는데, 귓속에 무언가가 차오르곤 했다. 그의 개의 귓속에서 상당량 묻어 나오는 적갈색을 띤 무언가의 정체가 곰팡이였다는 사실은 적지 않은 시간이 흐른 후에야 알게 되었다. 나와 그의 개가 함께 찾아간 개 전문 기관의 개 전문가는 그의 개의 귀가 다른 개들의 귀보다 깊다고 했다. 그의 개는 이제 검증된 깊은 귀를 지닌 개가 되었고 나는 깊은 귀를 지닌 개와 함께 깊은 귀를 지닌 주인에게 돌아왔다.

바깥출입을 삼가는 그는 바깥에서 바라보기에 죽은 듯 살았고, 그래서인지 그는 죽음에 매여 지냈다. 매일 밤 자리에 누워 좀처럼 오지 않는 잠을 기다리며 그는 죽음에 관해 생각했다. 아직 자신에게 다가오지 않은 죽음과 미지의 아이들이 맞이한 때 이른 죽음에 대해. 때 이른 죽음에는 대개 분명한 이유가 따른다. 그가 이미 늙었다는 사실 또한 분명하고 그러니 그가 아이로서 죽음을 맞이하기는 불가능하다. 말들의 감옥에 스스로 갇힌 그는 삶이 죽음과 닿아 있다고 느낀다. 그러나 나이 든 그는 아직 죽지 않았고 나이 들지 않은 아이들은 이미 죽어 있다. 그는 그 밖의 불가능한 일들에 대해서도 이따금 생각해본다. 꿈을 꾸지 않은 지 오래다. 자고 있었는데 깼는지, 깨어 있다고 생각했는데 잠들었는지, 잠이 들기는 했었는지, 모르겠다. 목이 마른 것 같다. 몸이 일으켜지지 않는다. 일어나보고 싶은데. 종잡을 수 없음. 그곳에 왜 가고 싶어 했는지, 지금은 생각나지 않는, 아무래도 좋을 이유. 배회하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곳에 가야 한다는 당위성만 희미하게 남아 있다. 잠을 자도, 잠에서 깨도, 생길 법한 일들이 생기지 않고, 생기더라도 그리 이상하지 않은 일들도 생기지 않는다. 생기더라도 크게 문제될 것 없는 일들도, 생겨 마땅한 일들도 생기지 않는다. 아무래도 생겨야 할 것 같은 일 또한 생기지 않는다. 아무 일 없다. 다만 생기기를 바라는 일만 남아 있다. 발생하기를 바라는 그것. 죽음을 기다리기. 검은 바다를 건너보고 싶다. 이스탄불에서 흑해를 건너면 조지아의 트빌리시에 닿을 수 있다. 검은 바다를 건너 다다른 낯선 곳에서 죽음을 기다리고 싶다. 이미 죽은 나를 기다리고 싶다. 오직 나만이 모르게 될 내 죽음의 형태를 미리 마주하고 싶다. 내게 다가올 나의 죽음을 위해 스스로 진혼곡을 불러 스스로의 넋을 달랜다. 죽은 나를 나로서 추모하고 애도한다. 나의 죽음을 나로서 만끽한다. 새로운 장례의 형태를 찾아. 살아서 제 발로 요양원을 향한, 이제 죽은 이들이 이미 그러했다. 일상의 습격을 평생 가까스로 방어해낸 끝에 죽음을 전리품으로 얻은 자들. 때가 되면 그곳으로 향할 수 있을까. 그 때를 알게 될 수 있을까. 하품이 비어져 나온다. 이번에는 꿈을 꿀 수 있을까. 죽음을 그만 생각할 수 있을까. 내가 모르는 죽음을. 내가 알고 싶은 죽음을. 그러나 삶은 죽음에 끝없이 기생하고 불가능한 일들에 대한 생각은 삶과 더불어 계속된다. 죽음으로의 망명을 꿈꾸며.

뒤척이던 그는 몸을 돌려버린다.

수년 동안 바깥출입을 하지 않은 그였지만 몇 년 전 한 번 밖에 나간 적이 있다. 그는 몇 년이 지난 후 나에게 그 얘기를 상세히 들려주었다. 그는 그날을 눈을 감고도 그려낼 수 있다고 했고 실제로 눈을 감고 얘기했다.

그날, 여름밤, 그는 사슴들을 만났다. 가능한 한 아무도 마주치지 않을 만한 시간을 택해 나와 집 앞 골목의 횡단보도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날 역시 잠을 기다렸지만 잠이 지독하게 오지 않았고 견디다 못해 물리적 피로를 쌓기 위해 나온 참이었다. 신호는 상당히 길게 느껴졌고, 금세 답답해진 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그 사슴들을 만났다. 야트막한 동산 입구, 어두컴컴한 정원 비슷한 곳에서 누군가 고개를 빼꼼 내민 듯한 모습이 눈에 들어왔고, 다시 어둠을 보니, 무언가가 있었다. 사슴들이었다. 두 마리는 커 보였고 두 마리는 작아 보였는데 전반적으로는 다 작아 보였다. 작은 사슴들이었다. 그는 사슴들의 도시 나라에 가면 그들의 다소 우악스러운 면모에 놀라게 되기도 한다고 들었던 기억을 떠올렸지만 그 사슴들은 그렇게 보이지는 않았고, 그래서 평소 사슴에 대해 막연하게 품고 있던 그의 인상에 그리 손상을 입히지 않았다. 다만 사슴들은 짐작보다 몸집이 작아서 우아하다기보다 앙증맞게 느껴졌다. 그의 개처럼.

개가 짖고 있다. 고양이들이 울기 때문이다. 그의 개가 짖는 건 아니다. 그는 고양이는 기르지 않는다. 마당의 고양이들은 어디에선가 왔고 갈수록 증식했다. 앞집의 누군가가 최소한의 시간을 들여 그들을 돌보고, 그는 종종 창문을 벌컥 열어 그리 깨끗한 편이 못 되는 마당을 뒹굴며 햇빛을 만끽하던 고양이 일가족을 놀래키는 정도의 역할을 맡고 있다. 같은 여름, 다른 밤이었고, 가는 비가 내려 땅이 좀 더 더러워졌던 그 밤에 비로소 그는 자신의 동네와 그가 익히 들었던 이스탄불이 닮아 있음을 깨달았다. 적당히 더럽고, 적당히 시끄럽고, 영문 모를 냄새가 떠돌고, 개가 많고, 고양이가 아주 많은 곳. 아주 많은 고양이들은 자주 다툰다. 밤새 다툴 때도 있는데 그러면 그 다툼 소리가 꿈속에서도 들린다. 그래서 고양이들이 다투는 날에는 꿈이 어지러워진다. 물론 운 좋게 꿈을 기억한다면. 그런데 그날은 잠들기도 전에 혹은 꿈을 꾸기도 전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날도 여느 때와 다를 바 없이 빠르게 자판을 두드리던 중이었는데, 불현듯 개와 벤치의 상관관계에 대한, 기이하게 잔혹한 어떤 말이 귀에 들려왔다. 맥락상 덜어내도 아무 상관 없어 보였던 그 말은 그러므로 참으로 잔혹한 말 그 자체로, 순수하게 잔혹한 나머지 듣는 이를 당황스럽게 했는데, 그 말을 들은 그가 그 말을 무심코 머릿속에 구체적으로 그려보았다는 사실이 그 밤에 벌어졌던 가장 당황스럽고도 잔혹한 일이다.

혹 사슴들에게 가까이 다가가봤다면 사슴들이 주고받는 소리가 들렸을지도 모른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가까이 다가갈 기회를 놓쳤고, 대신 길을 건널 기회를 잡았다. 그리고 길을 건너온 지금 그 사슴들의 소리를 내내 궁금해한다. 그리고 자신이 사슴들에게 말을 건네는 모습을 상상해본다. 그 뒷모습은 그가 그의 개에게 말을 건네는, 그가 한 번도 보지 못한 그의 뒷모습과 흡사하리라. 그리고 그의 개에게 말을 건네는, 그가 한 번도 보지 못한 그의 뒷모습은 그가 한 번도 보지 못한 개를 닮았을지 모른다. 머리와 꼬리를 잘라낸.

동물들은 숨을 거둘 때가 되면 제 몸을 숨기려 한다고 들은 적이 있다. 그래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또한 세상 바깥에 사는 자는 제 동료들을 찾게 마련이라고도 들었지만 이제는 그와 연락이 닿지 않는다. 언젠가 그에게 간략히 소식을 전할 마음을 먹고 무어라 몇 자 적기도 했지만 종이를 봉투에 넣지는 않았다. 어쨌거나 결국 답장을 받지는 못했을 것이다. 혹은 해독할 수 없는 답장을 받았거나. 나는 그에게 돌아갈 수 있는 시간을 다 지나 여기에 왔다. 그의 얼굴은 윤곽 정도로 남아 있다. 다만 선명한 그의 소리. 그가 내는 소리. 자판을 두드리는. 신속히. 꾸준히. 나는 그가 생산해내는 소리에 기꺼이 시간을 들였고 얼마간의 즐거움을 얻으며 지냈다. 그는 소리에 기생해 살았고 나는 그에 기생해 살았다. 그렇게 모자람 없이. 그런 시절이었다.

그가 들려주었던 어느 속기사에 대한 이야기. 그 속기사는 글자를 타이핑하는 대신 필기구를 이용해 공책에 직접 적어 내려가는 전통적인 방식을 고수하는데, 글자를 손으로 적어야 했기에 자판을 두드리는 속기사들에게 뒤처질 것을 대비해, 그는 들리는 말들을 자신만의 암호로 적어 내려간다고 했다. 그리고 추후 암호를 풀어 써낼지언정 애초의 암호는 누구에게도 보여준 적이 없다고 했다. 나는 그에게 그 여름밤에 그가 야트막한 동산 입구, 어두컴컴한 정원 비슷한 곳에서 만났던 사슴들이 실은 사슴을 닮은 조악한 모형들이었다고 끝내 말해주지 못했다. 그건 왜인지, 어느 책에서 읽은, 귀와 입이 막힌 친구에게 신비하게 보이지만 모호하기 이를 데 없는, 누구도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을 뒤섞어 지껄였던 한 인물의 선명한 잔인함을 닮은 일인 것만 같았다.

내가 그곳에 가기로 마음먹은 것은 그곳에 간판이 달려 있지 않다는, 오랜 시간 가장 무성했던 소문을 듣고서였고, 그곳에 간판이 달려 있지 않은 모습을 본 이는 아무도 없다고 들었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고, 이를테면 이제껏 아무도 만난 적 없는 이름 없는 이를 만나러 가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그 일을, 그와 다를 바 없기에 해보고 싶었고, 그 정도의 마음을 그 정도로 유지하고 있다. 글은 퍼지면서 증식하는 성향이 있다고 해, 병처럼. 언젠가 그가 내게 들려주었던 그 말은 좀처럼 해독되지 않는 말들로 끝없이 점철된 그의 글로써 증명되었다. 이제 나는 그를 떠나왔고 아직 그곳에 가지 않았다. 그러나 언젠가 야트막한 동산 입구, 어두컴컴한 그곳에 닿게 된다면, 나는 내가 오래전부터 그곳에 도착해 있었음을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김뉘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