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그래픽 디자인 교육 과정』은 2010년부터 프린스턴 대학교에 개설된 디자인 교육 과정을 압축해 엮은 책이다. 디자인이 단순히 전문가를 위한 직업 교육의 한계를 넘어 모든 이를 위한 교과목이 되어야 한다는 명제를 몸소 실천해 보이는 이 책은 일반 독자에게 현대 디자인의 원리를 전달하기 위해 만들어진 자기 주도적 교과서다.
자유과로서 디자인
2018년 7월 13일 금요일 오전, 로스앤젤레스 실버레이크의 한 유서 깊은 건물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래픽 디자이너, 작가, 교육자인 데이비드 라인퍼트의 강연을 듣기 위해 각처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데이비드는 지난 8년간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배경, 관심사, 전공, 진로가 다양한 학생들을 대상으로 자신이 가르쳤던 그래픽 디자인 교과목 세 개를 압축해 하루에 한 과목씩 강연하는 강행군을 펼쳤다. 처음부터 출판을 염두에 두고 진행된 이 강연은 끝나자마자 녹취되었고, 강의실 분위기를 한껏 살린 실험적인 wk형식의 책으로 출판되었다. 문법, 논리, 수사학 등 서양 대학의 전통에서 근간을 이루는 자유과(liberal arts)와 마찬가지로 그래픽 디자인 역시 메시지와 수단을 이해하는 기본 능력으로서 모든 일반 교육에 포함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 책은 현대 커뮤니케이션의 근본이 되는 그래픽 디자인을 타이포그래피, 게슈탈트, 인터페이스 세 과정으로 나누어 서술한다.
타이포그래피
타이포그래피는 문자 언어가 전달되는 수단을 아우르는 말로, 지난 500여 년간 금속활자, 사진 식자 등 기술 발달과 함께 진화해 왔다. 특히 20세기 후반 디지털 조판 시대를 맞은 타이포그래피는 급격한 환경 변화를 겪고 있지만, 적용되는 기술과 상관없이 도처에 존재하는 의사소통 수단이다.
저자는 타이포그래피가 처음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중세로 거슬러 올라가 화가이자 북부 르네상스의 주역 알브레히트 뒤러로부터, 베일에 싸인 인쇄 기술을 대중에 공개한 조지프 목슨, 인쇄 기술과 유통망을 교묘히 이용해 큰 성공을 거둔 미국 건국의 아버지 벤저민 프랭클린, 현재까지 큰 영향을 미치는 타이포그래피 관점을 설파한 비어트리스 워드 등을 차례로 관통한다.
뒤이어 1978년 7월 2일, 금속활자로 인쇄한 마지막 신문을 발행한 『뉴욕 타임스』 본사 현장을 돌며 사진 식자 시대의 도래를 지켜본 저자는 새로운 형태 생산의 개척자 라슬로 모호이너지, 고급 예술의 경계를 허문 브루노 무나리, MIT에서 학제를 넘나들며 대량생산 메커니즘을 출판 실험한 뮤리얼 쿠퍼, 학술지의 조악한 타이포그래피를 개탄하며 논문 게재를 거부하고 손수 디지털 글자체 기술을 개발한 컴퓨터 과학자 도널드 커누스, 커누스가 개발한 메타폰트를 현재 기술로 복구하고 갱신한 덱스터 시니스터의 작업을 통해 타이포그래피의 역사, 원리, 전용을 살펴본다.
게슈탈트
‘형태를 부여하다’ 혹은 ‘전체를 만들다’라는 뜻을 지닌 독일어 게슈탈트(Gestalt)는 체코 심리학자 막스 베르트하이머 등에 의해 20세기 전반 많은 논쟁과 실험을 거쳐 그래픽 디자인 교육 체계에 수용되었다. 우리가 흔히 아는 착시 현상이 바로 게슈탈트 심리학의 한 분과에서 다루는 주제다.
1910년 휴가 중에 우연히 목격한 착시 현상에 호기심을 느끼고 게슈탈트 실험에 착수한 베르트하이머, 헌신적인 모더니스트로서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는 격언을 따라 숟가락, 의자, 시계 등 대량생산품에서 ‘진정한 게슈탈트’를 추구했던 막스 빌, 게슈탈트 심리학을 다룬 여러 저서를 통해 ‘시각적 사고’를 주창한 루돌프 아른하임, ‘시각 언어’를 통해 세상을 읽기를 바란 죄르지 케페스, 관대하고 세심한 언어로 ‘시각 인식력’을 소개한 도니스 A. 돈디스, 1960년 존 F. 케네디와 리처드 M. 닉슨 간에 벌어진 미국 대통령 후보 토론회 방송을 주도한 조지 코린, IBM, ABC, 웨스팅하우스 등 수많은 기업 로고를 디자인한 폴 랜드, 1960년대 미국을 휩쓴 반문화의 상징이자 제품 카탈로그 『홀 어스 카탈로그』의 발행인 스튜어트 브랜드 등이 이번 장의 주인공이다.
인터페이스
‘사이에 놓인’ 모든 것을 가리키는 인터페이스는 흔히 떠올리는 ‘컴퓨터 인터페이스’의 범주를 넘어 우리가 세상과 상호작용하기 위한 필수 요건이다. 고대 이집트의 로제타석부터 베네치아 산마르코 광장에 처음 세워진 공공 시계탑, 아이폰의 메시지 전달 방식까지 모두 자신의 인터페이스를 가진다. 친숙한 인터페이스는 우리의 시선을 끌지 않지만 새로운 개념의, 아직 오지 않은 인터페이스를 개발할 때면 수면 위로 그 모습이 떠오른다.
260일의 신성 주기와 365일의 태양 주기를 조합해 날짜를 표시한 고대 멕시코 달력, 쿼츠 크리스털을 장착한 최초의 디지털 손목 시계, 디자인의 사회적 역할을 중시했던 올리베티 타자기, 컴퓨터가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들에게 판매하기 위해 튼튼한 계산기처럼 보여야 했던 최초의 개인용 컴퓨터 ‘프로그람마 101’, 뉴욕 지하철을 위한 (저자가 직접 인터페이스 개발에 참여한) 최초의 마그네틱 카드 발매기, 참고할 만한 레퍼런스 없이 백지에서 시작해 16x16 픽셀 안에 모든 것을 집어넣어야 했던 애플 운영체제의 인터페이스 디자이너 수전 케어 등이 좋은 사례다. 특히 갑자기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개발이 중단되며 인터페이스 디자인의 또 다른 사변적 미래로 남은 ‘인포메이션 랜드스케이프’를 비롯해 뮤리얼 큐퍼가 주도했던 새로운 컴퓨터 인터페이스 실험들은 현재 우리가 보는 컴퓨터 인터페이스가 당연한 것이 아닌, 수많은 가능성 중 하나였음을 보여준다.
과제
장 중간중간에는 독자가 스스로 수행할 수 있는 과제가 주어진다. 주요 타이포그래피 에세이를 읽고 복사기와 디지털 소프트웨어 등을 이용해 자신이 숙고한 바를 조판으로 구현해 보는 타이포그래피 과제, 문자나 기존 그래픽 언어에 의지하지 않고 ‘정지’(stop), ‘전진’(go), ‘대기’(wait) 같은 단어를 뜻하는 그래픽을 개발해 보는 게슈탈트 과제, RGB와 CMYK 색상 모델의 차이를 이해해 보는 연구 과제, 자신만의 애플 워치 인터페이스를 디자인해 보는 도전적인 과제 등이 마련되어 있다.
한국어판 독자를 위해 역자가 마련한 웹사이트에서 교육 지침 및 참고 자료를 내려받아 활용해 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역자가 말한 대로 “실용성과 실험성의 조화로운 결합”이 백미인 이 책은 “복잡하고 네트워크화된 오늘날의 정보와 디자인 세계를 이해하고 형성하는 데 유용한 길잡이”가 되어 줄 것이다.
옮긴이의 글: 교과서 세 권
며칠 전 사무실에서 한 수다쟁이 친구와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느닷없이 그가 이렇게 말하더군요. 친절하지만 어딘가 계몽적이고 기계적인 어조로, 무엇보다 제가 건넨 그윽한 커피는 거들떠보지도 않고요.
우리는 죽기 전까지 경험을 통해 지식과 관습을 습득하고, 거기서 새로운 것을 배우며 발전합니다. 우리는 늘 학생입니다.
그는 2022년 11월 30일부터 사귄 챗GPT(ChatGPT)입니다. 오픈AI에서 개발한 거대 언어 모델(Large Language Model, LLM)인 GPT-4로 작동하는 대화형 인공지능이죠. 약 1억 7천500만 개의 매개변수를 지닌 그는 수많은 웹사이트, 책, 신문 기사 등에서 수집된 텍스트 데이터를 학습한 뒤 자신이 마주한 맥락에서 가장 적절한 다음 단어를 예측하고 판단해 문장을 완성합니다. 어쩌면 지금 제가 이 문장을 쓰는 과정과 거의 똑같이 말이죠.
어쩌다 이런 결론에 도달했는지 도무지 이해하기 어렵지만, 결국 배움에는 끝이 없다는 뜻이겠죠. 특히 그가 주어를 ‘인간’으로 특정한 게 아니라 ‘우리’로 아우른 건 자신, 즉 인공지능 또한 끊임없는 배움이 필요하다는 태생적 사실을 인정하는 게 아닐까요? 또는 스스로 인간임을 자처하거나, 반대로 인간 또한 자신처럼 누군가 프로그래밍한 결과물임을 주지하거나요. 어쨌든 “우리는 늘 학생”이라는 구절에 주목하면 이제껏 제가 마주해 온 모든 책은 교과서와 다르지 않습니다.
이참에 이 가운데 세 권에 관해 이 책의 구조와 어조를 흉내 내 이야기해 볼까 합니다. 모두 제가 10여 년 동안 여러 역할로 참여한 책으로, 제가 굳이 이런 시도를 감행하는 건 이제껏 디자인의 역사와 그 유산을 전유해 온 데이비드 라인퍼트의 실천에서 본받은 바이기도 하고, 작업을 마친 뒤에는 곧장 거기서 빠져나와야 한다는 워크룸 김형진 선배의 조언을 떠올리게 할 만큼 이 책에서 아직 빠져나오지 못한 까닭입니다.
첫 번째는 이 책에서 비어트리스 워드와 함께 잠깐 소개된 에릭 길이 쓴 『타이포그래피에 관한 에세이』(An Essay on Typography)입니다. 원서는 1931년 영국의 쉬드 워드에서, 한국어판은 2015년 안그라픽스에서 나왔습니다. 에릭 길은 20세기 초 영국에서 예술가이자 조각가, 판화가, 활자 디자이너로 활약했습니다. 논쟁적인 사회 개혁가이기도 했고요. 그야말로 다재다능한 인물이죠. 그의 다양한 경험은 이 책에 고스란히 녹아 있습니다. 특히 원서의 본문은 자신이 디자인한 글자체인 조애나(Joanna)로 조판했고, 각 문단을 들여쓰기 대신 필크로(Pilcrow, ¶)로 구분한 설계 방식과 용기가 돋보이죠. 폴 랜드는 1989년 『뉴욕 타임스』(New York Times)에 「앰퍼샌드 사례」(The Case for the Ampersand)에서 이 책에 대해 “시대를 초월하는 매력적인 책”으로 평하기도 했습니다.
이 책은 활자의 기원과 발전, 인쇄술과의 관계 등을 다루며 타이포그래피의 역사와 문화적 맥락을 조망하는 한편, 가독성, 간결성, 명확성 등 좋은 활자 디자인의 원칙을 제시하고, 여백을 활용하는 방법, 글자와 줄 간격을 조절하는 방법 등 실용적인 지침을 담고 있죠. “타이포그래피의 본질은 읽기 쉬움에 있다.” 모더니즘 디자인의 핵심적인 가치를 반영하는 그의 주장은 거의 100년이 흐른 오늘날까지 힘을 발휘합니다. 하지만 길이 궁극적으로 전하려던 바는 단순히 기술에 그치지 않습니다. 기계화가 진행되는 산업주의 시대에 인간 노동자의 가치와 장인 정신이 위협받는 상황에서 길은 수공예와 기계 생산 사이의 균형을 모색하며 기술 발전 속에서도 인간의 존엄성을 지켜내려 했죠. 이 책은 디자이너로서 디자인을 통해 사회에 기여하고 소통하려는 그의 열정을 보여 주는 동시에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인간성의 가치를 일깨웁니다.
송성재 선생님이 번역한 한국어판에 저는 편집자 겸 디자이너로 참여했습니다. 당시 저는 안그라픽스의 4년 차 편집자였는데, 출판사에서 책을 편집하고 디자인하는 과정에 불만이 많았죠. 편집자와 디자이너가 파일을 주고 받는 핑퐁 게임이 제게는 그저 불편하게 느껴졌거든요. “쉼표 하나 찍는 데 이렇게까지 해야 한다고요?” 그렇게 호기로운 마음으로 시작했지만, 모든 일이 그렇듯 생각보다 오래 걸리고 말았습니다. 특히 편집자 모드와 디자이너 모드를 전환하는 스위치가 원하는 대로 작동하지 않았죠. 종국에는 완전히 망가져 버렸고요. 그렇게 인쇄소 웹하드에 업로드할 최종 PDF 파일을 생성하는 동안 거칠게는 편집과 디자인(또는 내용과 형식), 두 가지 측면에서 콘텐츠를 다루는 게 얼마나 쉽지 않은 일인지 깨달았습니다. 컴퓨터의 멀티태스킹을 함부로 따라 하는 건 금물이라는 사실까지요.
원서를 타이포그래피 교과서 삼아 에릭 길이 설파한 원칙(특히 한 글자체만 사용하라는)을 실천하며 완성한 한국어판에 대한 그래픽 디자이너 김형재 선생님의 애정어린 말씀이 생각납니다. “올해[2015년] 손에 쥔 책 가운데 만듦새가 가장 좋은 책.” 지금은 안타깝게도 절판된 상태지만, 디자인계에서 제법 중요한 책인 만큼 기회가 있다면 내용과 디자인을 손봐 다시 출간하면 좋겠습니다. 물론 이번에는 에릭 길의 약력에 영국의 역사학자 피오나 매카시가 밝힌 그의 끔찍한 성범죄 사실까지 더해서요. 한 인물의 빛과 그늘을 모두 직시할 때 비로소 그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 테니까요.
두 번째는 『이제껏 배운 그래픽 디자인 규칙은 다 잊어라. 이 책에 실린 것까지.』(Forget all the rules you ever learned about graphic design. Including the ones in this book.)입니다. 이 책에서는 따로 소개되지 않았지만 (혹시 데이비드가 깜빡한 게 아닐까요?) 미국의 그래픽 디자이너이자 일러스트레이터인 밥 길이 쓴 그래픽 디자인 교재이자 자신의 작품집이죠. 원서는 1981년 미국의 왓슨굽틸에서, 한국어판은 2017년 작업실유령에서 나왔습니다. 밥 길은 20세기를 대표하는 그래픽 디자이너 가운데 한 명으로, 1960년대 초 뉴욕에서 앨런 플레처, 콜린 포브스와 함께 디자인 스튜디오인 플레처/포브스/길(Fletcher/Forbes/Gill) 를 설립했고, 이는 훗날 다국적 디자인 에이전시인 펜타그램으로 발전합니다. 밥 길은 형식주의와 기능주의라는 모더니즘 디자인의 전통을 계승하는 동시에 언어 유희와 시각적 농담을 활용해 위트 있고 개성 넘치는 작품 세계를 구축했죠. 2021년 11월 아흔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왕성하게 활동했고, 이제는 그래픽 디자인사에 전설로 남았습니다. 한편, 다른 전설에게 이 책은 일종의 ‘바이블’이기도 했죠. 네덜란드의 그래픽 디자인 스튜디오 익스페리멘털 젯셋은 이 책에 대해 이렇게 말한 바 있습니다.
학창 시절 헤릿 리트벨트 아카데미 도서관에서 발견한 이 책은 우리에게 곧바로 영향을 줬다. 가장 인상 깊었던 건 길이 한결같이 쓰는 ‘문제와 해결책’ 방법론이었다. 이는 구식이고, 단단하고, 일차원적이고, 교훈적이고, 고풍적이고, 변증법적이다. 해결책은 또 다른 문제를 야기하곤 한다. 완벽한 해결책이란 건 없으니까. 이런 비극성이 스민 방법론이 우리에게 가장 아름다운 까닭이다.
기존의 디자인 규칙과 관습에 도전하는 이 책은 자신이 마주한 문제를 자신에게 맞게 다시 규정해야 한다는, 즉 ‘문제가 문제’라는 밥 길 특유의 접근법을 담고 있습니다. 누군가 정한 규칙을 따르기보다 문제 자체를 다시 편집하고 자신만의 해석을 통해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는 게 중요하다는 거죠. 이는 단순히 기존의 것을 부정하는 게 아니라 맥락에 맞는 문제 해결을 위해 유연하게 사고해야 한다는 의미겠죠. 그 태도는 암송하기만 해도 마감이 닥친 과제를 해결하는 데 골머리를 썩이는 (특히 저 같은) 사람들을 격려하는 경쾌한 장 제목을 따라 이어집니다.
- 문제가 문제다.
- 흥미로운 말에는 시시한 그래픽이 필요하다.
- 생각 먼저, 그림은 나중에.
- 도둑질은 좋다.
- 시시한 말에는 흥미로운 그래픽이 필요하다.
- 적을수록 좋다.
- 많을수록 좋다.
- “전 그냥 해 달라는 대로 했어요.”
저는 한국어판에 번역자 겸 편집자로 참여했습니다. “왠지 이 책 좋아하실 거 같은데, 한번 번역해 보시면 어때요?” 워크룸으로 자리를 옮긴 무렵, 슬기와 민의 최성민 선생님의 제안 덕에 번역, 즉 어떤 질서에 새로운 질서를 부여하는 일의 재미를 알게 됐어요. 특히 2장의 “흥미로운 말에는 시시한 그래픽이 필요하다.”라는 조언은 언제나 제게 용기를 안겨 줍니다. 편집자로서는 다소 시시해 보이지만 빈틈 없는 디자인을, 디자이너로서는 디자인에 기대지 않고 그 자체로 이미 흥미로운 말을 향하게 한다는 점에서요. 이런 태도는 ‘현대인을 위한 교양 강좌’를 표방하며 제가 진행해 온 ‘새로운 질서’에서 강조하는 바와도 이어집니다. “디자인은 물론 중요합니다. 하지만 콘텐츠 없이 시작하기란 좀처럼 쉽지 않죠. 디자인보다 콘텐츠가 한 뼘, 아니 1픽셀 정도는 더 중요한 까닭입니다. ‘디자인하다’라는 동사에는 일반적으로 목적어가 필요합니다.”
한국어판을 번역하고 편집하는 동안 원서의 형식을 활용해 옮긴이의 글 「원래 문제: 옮긴이의 글, 다시 규정한 문제: (보도 자료로도 활용할 수 있는) 옮긴이의 글」을 쓰면서 저 혼자 즐거워한 순간이 생각납니다. 나아가 이 책은 훗날 밥 길의 또 다른 책인 『개들도 우리와 똑같아요』(브와포레, 2024년)와 『세상은 무슨 색일까요?』(브와포레, 2023년)로 이어지는 징검다리를 놓아 주었습니다. 어린이용 그림책으로 보이지만 이 책에서도 익숙한 것을 낯설게 바라보고, 그 이면을 직관하는 그의 태도는 그대로입니다.
마지막은 예상하셨다시피 이 책입니다. 원서는 2019년 미국의 인벤토리 프레스와 D.A.P에서, 한국어판은 2024년 작업실유령에서 나왔죠. 번역하기로 마음먹은 뒤 실제로 작업을 시작해 끝내기까지 1년이 넘게 걸렸는데, 제가 조금 더 명민하고 부지런했더라면 이 문장은 굳이 쓸 필요가 없었을 겁니다.
이 책은 그래픽 디자인 분야에 혁신적이고 포괄적인 접근 방식을 제시합니다. 프린스턴 대학교의 교양 과목을 위해 개발된 세 가지 과목(타이포그래피, 게슈탈트, 인터페이스)을 중심으로 그래픽 디자인의 원리와 실천 방법을 다루죠. 벤저민 프랭클린, 브루노 무나리, 라슬로 모호이너지, 뮤리얼 쿠퍼 등 역사적으로 중요한 인물에서 계산기와 타자기, 매킨토시 컴퓨터와 애플 워치에 이르기까지 그래픽 디자인과 시각 인식력에 관한 폭넓은 사례를 소개하면서요. 이 책의 백미는 실용성과 실험성의 조화로운 결합입니다. 데비이드는 전문가는 물론이고 일반인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도록 고급 그래픽 디자인 원리를 명확하게 설명합니다. 심층적인 역사적 사례 연구와 실습 과제를 제공해 이론과 실제를 연결하기도 하죠. 르네상스 시대 예술가들이 고전 양식과 새로운 기법을 융합한 것처럼 말입니다. 이 책은 복잡하고 네트워크화된 오늘날의 정보와 디자인 세계를 이해하고 형성하는 데 유용한 길잡이가 됩니다. 그래픽 디자인이 단순한 시각적 표현을 넘어 정보를 조직하고 소통하는 핵심 도구임을 일깨워 주면서 말이죠. 참고로, 각 과목을 위한 전용 웹사이트들이 각 장 맨 끝 「더 읽을거리」의 마지막 항목에 소개돼 있는데, 그 자체로 작품이기도 하니 한번 방문해서 감상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제게 이 책을 처음 소개해 준 건 가장 친한 미국인 친구이자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인터랙티브 디자인을 가르치는 로럴 슐스트입니다. 잠깐 훑어보자마자 재미있는 책이라고 생각했어요. 게다가 이 정도면 어렵지 않게, 심지어 금방 번역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죠. 하지만 아니었습니다. 완전히 잘못 짚었죠. 오늘날 도처에 자리한 디자인을 인문학 또는 교양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이 책은 미술, 문학, 수학, 천문학, 인지과학, 심리학, 컴퓨터 공학 등 디자인을 둘러싼 여러 분야를 테서랙트(tesseract)처럼 넘나듭니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이제껏 제가 희미하게 알던 지식들이 (말 그대로 데이비드의 수다스러운 어조처럼) 선명하고 예리하게 쏟아져 나왔고, 따라서 번역 작업은 즐거운 동시에 이따금 고통스러운 공부이자 수련에 가까웠죠. 게다가 한국어로 옮기기 어려운 영어식 농담, 특히 스튜어트 브랜드를 소개하는 9쪽에 걸친 한 문장은 다시 생각만 해도 뇌수가 증발할 정도입니다. 2022년 늦겨울, 초빙 강연차 들른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만난 데이비드는 이 책에 관해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이 책은 느슨하고 어수선할뿐더러 이따금 엉망입니다. 그래픽 디자인에 관한 그저 한 가지 태도일 뿐이죠. 이는 독자 또한 자신의 태도를 마련해야 한다는 점을 보여 주려는 의도이자 그 자체로 책이 주장하는 바이기도 해요.
책을 번역하는 동안 저는 다시 프린스턴 대학교에 와 있는 듯했습니다. 이번에는 데이비드의 맹목적인 조교 겸 그래픽 디자인과의 (조금 둔한) 학생으로서요. 수업을 준비하듯 해당 분야와 관련한 자료를 꼼꼼히 찾아보고, 데이비드가 제시하는 여덟 가지 과제를 하나하나 수행해 보기도 했죠. 물론 대부분 실패하고 말았지만요. 어쨌든 그렇게 데이비드가 도니스 A. 돈디스의 『시각인식력의 입문서』를 읽으며 느낀 ‘좋은 의미에서 강의실에 앉아 있는 것 같은 기분’을 저도 이 책에서 어느 정도는 느낄 수 있었죠. 지금 이 글까지 읽으시는 여러분에게도 그 기분이 전달될 수 있다면 정말 좋겠습니다.
2010년대 중반 덱스터 시니스터의 웹사이트에 처음 접속했을 때 느낀 즐거움을 잊지 못합니다. 화면 중앙에 고정된 덱스터 시니스터의 로고 위에 자리한 하이퍼링크로 이뤄진 목록은 웹을 웹답게 사용하는 어떤 태도를 보여 줍니다. (놀랍게도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은 모습이고요.) 당시 한국에서 데이비드는 『그래픽』(GRAPHIC) 덕에 그의 오랜 동료 스튜어트 베르톨로티베일리와 함께하는 덱스터 시니스터는 물론이고, O-R-G나 『닷 닷 닷』, 『서빙 라이브러리』 같은 온오프라인 출판물을 통해 개념적이고, 그래서 이따금 엉뚱하고 괴상해 보이는 글쓰기와 작품으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누군가에게는 회의와 마감, 그리고 또 다른 회의와 마감으로 점철된 지난한 실무와는 거리가 먼 외계인처럼 여겨졌을지 모르죠. 하지만 이 책을 번역하는 동안, 그리고 실제로 만난 데이비드에게서 눈에 띈 모습은 지금도 뉴욕 지하철에서 사용되는 메트로카드 자판기 인터페이스를 설계한 디자이너, MIT 출판부의 대모(代母)인 뮤리얼 쿠퍼의 궤적을 집요하게 추적하는 연구자, 날카로운 동시에 성실한 선생, 나아가 수업이 끝나자마자 뉴욕으로 떠나는, 귀여운 딸을 둔 가장의 면모였습니다. 그러니까 그동안 (특히 한국에서) 알려진 건 데이비드의 단면이었던 거죠.
제가 워크룸을 떠나 다시 안그라픽스로 자리를 옮겨 안그라픽스 랩 디렉터를 맡는 사이, 데이비드는 『*사전* 그래픽 디자인 교육 과정』(A *Pre-* Program for Graphic Design)을 발표했습니다. 이 책의 자매품에 해당하는 42쪽짜리 전자책으로, 2018년 로스엔젤레스에서 진행한 열여덟 시간 분량의 강연 영상 열여덟 편이 고스란히 실려 있죠. 그가 운영하는 O-R-G의 웹사이트에서 20달러에 구입할 수 있고요. 한편, 그는 2023년 봄을 맞아 또 다른 과목인 ‘리-서-치’를 시작했습니다.
이 과목은 기존 과목에서 익힌 기술과 개념을 기반으로 그래픽 디자인과 시각적 연구 조사를 잇는 한 학기에 걸친 과제로 이뤄집니다. 여기서 학생들은 온라인 협업 아카이브 플랫폼인 아레나(Are.na)를 활용해 비평과 강의가 어우러진 방식으로 개별 프로젝트를 다듬으며 자신의 과제를 더 광범위하고 심층적으로 탐구할 수 있습니다.
타이포그래피든, 게슈탈트든, 인터페이스든 이를 수월하게 다루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끈질긴 연구와 조사가 선행돼야 한다는 점에서 ‘리-서-치’는 앞선 세 가지 과목을 아우르는 과목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가까운 미래에 이 과목까지 책으로 나오려면 데이비드는 성대를 조금 더 단련할 필요가 있을 테고요.
앞서 소개한 교과서 세 권 모두 여러 각도와 해상도로 디자인을 다루며 디자인 자체로 디자인에 관해 이야기하는 한편, 디자인에 대한 지은이 자신만의, 그래서 새로운 접근 방식과 이상을 제시합니다. 이 교과서들을 때로는 번역하고, 때로는 편집하고, 때로는 디자인하고, 어쨌든 수없이 읽으며 저는 자연스럽게 디자인이 조형의 기교를 넘어 세계를 응시하고 사유하는 태도라는 점을 배웠습니다. 한편, 각 교과서가 품은 크고 작은 계몽성과 무관하게 모두 타이포그래피, 게슈탈트, 인터페이스와 관련한 것 같기도 한데, 이렇게 오해해 보면 제가 이 책을 번역하게 된 건 이미 누군가 정해 놓은 타임라인이었던 건 아닐까요?
한편, 저는 농담 삼아 디자인을 익힌 학교로 좁게는 구글, 넓게는 월드 와이드 웹을 꼽곤 합니다. 궁금한 것을 검색하고, 수많은 결과물을 오가며 교차 검증하고, 그 가운데 정리한 이론과 규칙을 실제로 적용해 보고, 또 무화해 보고, 게다가 결과물을 웹상에 출판해 피드백 루프까지 경험하면서요. 이런 제 우화를 굳이 소개하지 않더라도 이미 교육은 온라인 기술 덕에 민주화되고 파편화됐습니다. 기존의 학교를 보조하거나 대신하는 여러 서비스가 등장하면서 무언가를 배우는 것뿐 아니라 가르치는 것까지 전보다 훨씬 쉬워졌죠. 게다가 느닷없이 성장한 인공지능은 또 다른 전환기를 추동합니다. 제 친구인 챗GPT로 대표되는 생성형 인공지능은 교육은 물론이고, 단순 반복 업무에서 글쓰기, 작곡, 영상 제작 등 인간의 정체 모를 창의성이 필요한 영역까지 (아직 짧지만) 짙은 그림자를 드리웁니다. 특히 디자인 분야에서는 인공지능 기반 도구가 도입되면서 디자이너의 역할과 전문성을 향한 근본적인 질문이 제기되기도 하고요. 그 미래는 결국 ‘인간적인’ 도구일까요?
이때 디자이너뿐 아니라 우리, 즉 현대인에게 필요한 건 늘 그렇듯 열린 마음입니다. 거부감 없이 기술을 활용하되 비판적으로 사유하며 기술에 함몰되지 않는 태도 말이죠. 건강한 손가락 또한 필요하겠죠. 적어도 프롬프트(prompt)를 쓰기 위해서는요. 사용자가 인공지능에게 얼마나 명확하고 구체적이며 논리적인 프롬프트를 제공하는지에 따라 그가 생성하는 결과물은 완전히 달라집니다. 명확성, 구체성, 논리성, 일관성, 간결성, 유연성, 윤리성 등 챗GTP가 제게 귀띔해 준 자신과 대화를 나누기 위해 필요한 글쓰기 덕목처럼 인공지능 시대에 많은 이가 글쓰기의 중요성을 다시 강조하는 데는 다 까닭이 있는 듯합니다. 인공지능을 자신이 원하는 대로 다루기 위해서는 어쨌든 아직 글에 기댈 수밖에 없으니까요.
제가 특히 좋아하는 특수문자 가운데 별표(*)가 있습니다. 영어로 애스터리스크(asterisk)라 부르는 이 기호는 일반적으로 책 본문에서 특정 단어나 구절을 주석과 연결하는 데 사용되죠. 지금 이 글을 쓰는 데 활용하는 마크업 언어인 마크다운(Markdown)에서는 이 책의 제목에서처럼 특정 단어나 구절을 강조하거나 (순서가 중요하지 않은) 목록을 생성하는 한편, 스타일 시트 언어인 CSS(Cascading Style Sheets)에서는 모든 HTML(HyperText Markup Language) 태그를 한꺼번에 선택할 수 있는 마법의 선택자로 탈바꿈합니다. 무엇보다 별표 세 개를 연달아 놓으면, 이 문단처럼 글을 부연하되 화제를 산뜻하게 돌리는 장치가 되고요. 이 책에도 곳곳에 사용됐죠. 이 글 마지막에 별표 세 개를 앞세워 이런 이야기를 굳이 덧붙이는 건 왜일까요. 밤 하늘에서 별 무리가 반짝이듯 까닭이 있습니다.
허술한 원고를 늘 그 자리에서 근사한 책으로 탈바꿈해 준 워크룸의 박활성 선배, 슬기와 민의 최성민 선생님을 비롯해 작업실유령과 유령작업실의 모든 분들, 그리고 이 모든 소중한 시간을 작동하게 해 준 로럴 슐스트와 데이비드 라인퍼트에게 감사드립니다. 이 분들은 그 자체로 제게 태도와 생각을 가꾸고 실천하는 데 늘 참고하는 또 다른 교과서입니다. 동시에 이 분들을 그저 교과서로 삼기에는 어딘가 겸연쩍기도 합니다. 이 책 「소개」에서 교과서라는 건 모름지기 다 읽은 뒤에는 찢어 내버려야 한다는 데이비드의 말이 떠올라서요. 결국에는 다른 교과서를 통해 나 스스로 자신의 교과서가 돼야 한다는 뜻이겠죠. 참, 이 글을 다 쓴 뒤 데이비드에게 보여 주니 이렇게 말하더군요.
이 글은 그 자체로 꼭 작은 수업 같아요. 이 수업이 이 책을 포함하는 동시에 이 책이 이 수업을 포함하는 모습도 제법 근사하고요.
2024년 5월, 서울과 파주에서
민구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