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구홍은 느닷없이 일본의 도쿄 아트 & 스페이스(Tokyo Arts & Space, TOKAS)에서 주관하는 2026년 국제 창작자 레지던시 프로그램(International Creator Residency Program)에 지원해보기로 마음먹었다. 모든 느닷없음에는 까닭을 따지기 어렵다. 2026년 5월부터 시작되는 이 프로그램은 도쿄에서 3개월 동안 머물며 작업과 연구를 이어갈 수 있는 기회였다. 무엇보다 항공료, 숙박비, 작업비까지 전액 지원되는 만큼 전생에 일본인으로 알려진 그에게는 자신의 고향에서 3개월 동안 무료로 기생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지원에 필요한 서류는 세 가지였다. 지원서, 추천서, 포트폴리오.
우선 민구홍은 지원서를 준비했다. 주요한 네 가지 질문 앞에서 민구홍은 잠시 예술가가 된 듯 10년 동안 고민해온 자신의 생각을 소상히 밝혔다.
네 가지 키워드를 이용해 귀하의 작업, 접근법, 예술적 관심을 정의해주십시오.
- 자기소개 / 정체성: 자신을 말하고 쓰고 고치는 일. 민구홍 매뉴팩처링에서는 이 모든 과정을 ‘회사 소개’라는 이름으로 수행한다. 소개는 한 번으로 끝나지 않고, 웹사이트, 제품, 문장 속에서 ‘제품’이라는 이름으로 반복된다. 온갖 없음 사이에서 소개는 곧 있음을 유지하는 방식이다.
- 손으로 만든 웹 교육 / 배움: HTML, CSS, 자바스크립트를 단순한 기술이 아닌 감각과 태도로 배우는 일. 「새로운 질서」에서는 이 언어를 통해 스스로를 소개하는 방법을 익힌다. 느림과 작음을 추구하는 핸드메이드 웹의 정신을 바탕으로 웹은 화면 밖에서 저마다의 삶의 구조가 된다.
- 편집 구조 / 내용과 형식: 문장을 쓰고 다듬고 배치하는 일. 매뉴얼인 동시에 어딘가 시적인 문장, 소개인 동시에 자격 없는 선언. 민구홍 매뉴팩처링에서는 문서 하나, 웹 페이지 하나도 구조적 편집 실험이다. 내용은 형식 없이는 존재할 수 없고, 형식은 내용을 끊임없이 다시 쓰고 편집한다.
- 기생적 실천 / 방법과 기술: 독립 대신 잠시 머무는 방식. 숙주의 자원을 빌려 쓰고, 그 대신 무언가를 건네는 관계. 글쓰기와 웹, 디자인을 통해 작동하는 민구홍 매뉴팩처링은 늘 어딘가에 기생하고, 그 기생 속에서 새로운 기술과 방법을 탐색한다.
과거 또는 현재 진행 중인 작업과 관련지어 귀하의 예술 활동 개념을 150단어 이내로 서술해주십시오.
나의 예술 세계는 ‘자기소개로서의 글쓰기’, 즉 구조적이고 어딘가 시적인 글쓰기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나는 ‘민구홍 매뉴팩처링’이라는 허구이자 실재하는 1인 회사를 통해 매뉴얼, 웹사이트, 개념적 문서 등 자기 초상 같은 산출물을 ‘제품’이라는 이름으로 생산한다. 이들은 모두 마이크로 인프라를 구축하는 시뮬레이션이며, 정체성이 어떻게 쓰이고, 편집되고, 수행되는지 탐구한다. 한편, 2016년부터는 일반적인 교육 시스템 바깥에서 진행해온 교육 프로그램 「새로운 질서」를 운영하며 500명 이상의 참가자들과 HTML, CSS, 자바스크립트를 사유와 자기 구성의 도구로 다뤄왔다. 그렇게 출판과 디자인, 교육을 하나의 흐름으로 엮으며, 코드와 타이포그래피, 편집 구조를 매체를 넘어 살아가는 방식으로 삼는다. 이 작업은 자기소개가 되풀이되는 설계 행위로 작동하며, 언어와 인터페이스, 반복을 통해 예술가라는 존재를 다시 설계하는 장을 마련한다.
왜 도쿄에서 TOKAS와 함께 활동하고 싶은지, 거기서 무엇을 기대하는지 150단어 이내로 설명해주십시오.
나는 오랫동안 도쿄의 동인(同人) 소프트웨어 시장, 마이크로 레이블, 문방구의 미학, ‘귀염성’ 이론 등 소규모 출판 문화와 허구적 인프라, 어딘가 시적인 시스템을 동경해왔다. TOKAS는 내게 하나의 공간일 뿐 아니라 그런 실험 구조를 위한 개념적 숙주로 보인다. 나는 민구홍 매뉴팩처링이라는 1인 기생 회사를 도쿄의 다층적인 창작 생태계에 잠시 접붙여볼까 한다. 현장 조사, 인프라 따라 하기, 조용한 관찰을 통해 자기 기관화(self-institution)의 개념을 더 깊이 들여다보는 식으로. 내게 도쿄는 특유의 엄격함과 유희가 공존하는 감각, 규칙이 형식과 픽션을 통해 새롭게 쓰이는 방식이 매력적이다. 나는 TOKAS가 생산 공간을 넘어 ‘나’라는 존재가 타인을 통해 반복적으로 재구성되는 ‘회사의 리허설 장치’가 되기를 소망한다.
레지던시의 목적과 계획을 200단어 이내로 설명해주십시오.
내가 수행할 「예술가 시뮬레이터」(Artist Simulator)는 한 예술가가 공간 안이 아니라 타인을 통해 존재할 수 있는 방식을 탐구하는 기생적 제안이다. 선정된다면 민구홍 매뉴팩처링 운영자 민구홍, 즉 나는 TOKAS에 임시로 기생하며 다음의 세 가지 도구를 개발하려 한다. 예술가를, 나아가 자신을 편집하는.
- 자기소개를 위한 웹 기반 인터랙티브 인터페이스
- 자기 수행을 위한 시적인 대본
- 예술가 기생을 위한 현장 안내서
이 작업은 민구홍 매뉴팩처링 10년과 「새로운 질서」 5년, 그리고 ‘편집으로서의 디자인으로서의 글쓰기’의 결합이라 할 만하다. 「새로운 질서」는 코딩을 개념적 글쓰기로 가르치는 교육 프로그램이며, 글쓰기와 디자인, 편집은 모두 자기소개 행위로 간주된다. 「예술가 시뮬레이터」는 그 자체로 예술가의 정체성이 단단히 고정된 것이 아니라 연습되고 재구성될 수 있다는 점을 실험한다. 예술가는 ‘제시되는’ 존재가 아니라 ‘다시 쓰이는’ 존재이며, 작가는 ‘기원’이 아닌 ‘배열’, ‘선언’이 아닌 ‘장치’로서 존재하는 까닭이다.
그 뒤에는 이제껏 10년 동안 활동해온 미술 및 디자인계 안팎에서 민구홍이 존경하는 선생님들께 이메일로 정중히 추천서를 부탁했다. 그 가운데는 우연히 알게 돼 지금까지 교유하는 일본인도 포함됐다. 혹시 심사 위원과 우연히 연결될 수 있지 않을까 내심 기대하며.
선생님, 안녕하세요.
다름이 아니라 이번에 도쿄 아트 & 스페이스(TOKAS)에서 주관하는 ‘2026년 국제 창작자 레지던시’에 지원해볼까 하는데, 혹시 가능하시다면 선생님께 추천서를 부탁드릴 수 있을지 여쭙고자 메일 드립니다.
이 프로그램은 전 세계 시각 예술, 디자인, 건축, 영화 분야 창작자를 대상으로 도쿄에서 3개월 동안 거주하면서 작업과 연구를 진행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레지던시라고 합니다. 저는 도쿄에 임시로 기생하면서 글쓰기와 코딩, 온오프라인을 아우르는 개념적 출판을 탐구해볼 기회로 삼아보려 합니다.
추천서 관련 사항은 다음과 같습니다:
— 언어: 영어 또는 일본어
— 형식: A4 PDF, 작성 일자와 서명(손글씨 또는 디지털) 포함 자유 양식이고, 분량 제한은 없습니다.
— 제출 방식: 선생님께서 직접 발송하실 필요는 없고, 제가 받아서 함께 제출하면 된다고 합니다.
— 최종 마감일은 일본 시간 기준 2025년 6월 25일(수) 오후 6시인데, 6월 23일(월)까지 받을 수 있다면 가장 이상적일 것 같습니다.
필요하시다면 작업 설명이나 이력서, 추천서 초안 등도 보내드릴 수 있습니다.
바쁘신 와중에 이런 부탁을 드리게 되어 송구하지만, 가능하시다면 정말 큰 힘이 될 것 같습니다. 부담 없이 편히 말씀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민구홍 드림
마지막은 포트폴리오였다. A4 여섯 장 안에 세 가지 프로젝트를 정리해야 했다. 민구홍은 지난 10년을 하나하나 들춰봤다. 뭔가 지나치게 많고 어수선했다. 이 가운데 단 세 가지만 추리는 일은 편집자로 일했지만 아무래도 쉽지 않았다. 결국 하늘을 활공하는 까마귀처럼 시야를 넓혀 전체를 세 갈래로 묶었다. 즉, ‘민구홍 매뉴팩처링’, ‘새로운 질서’, ‘편집으로서의 디자인으로서의 글쓰기’. 이렇게 하면 크고 작은 모든 일이 고스란히 세 바구니에 담기리라.
서류 마감은 6월 25일 오후 6시. 그 뒤에는 완전히 민구홍의 손을 떠난다. 웹사이트를 공개하듯 이는 익숙한 일이다. 그런데 만약 레지던시 입주 창작자로 선정된다면 지금 근무 중인 AG 랩은? 그건 나중 문제다. 어쨌든 결과와 무관하게 이 과정과 이 과정에서 생산된 부산물 또한 민구홍 매뉴팩처링의 제품 가운데 하나가 된다. 물론 어떤 고객에게는 이 제품이 제법 유용한 반면교사가 될지 모른다. 즉, 도쿄 아트 & 스페이스 국제 창작자 레지던시 프로그램 지원 서류는 이렇게 준비하면 반드시 실패한다는 메시지를 품은 실패 예제 겸 자기소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