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구홍 매뉴팩처링에서 제안하는
레인보 셔벗(Rainbow Sherbet)의 내용을 한마디로 설명하기란 아주 어렵다는 점을 미리 밝히며 독자에게 얼마간 양해를 구해야 할 것 같다. 또는 이렇게 적을 수도 있겠다. 만일 이 책이 한마디로 설명된다면, ‘레인보 셔벗’은 근본적으로 실패한 것인지도 모른다고.
아카이브 봄과 작업실유령에서 공동 출판한 이 책은 2015년부터 2019년 사이에 생산된 민구홍 매뉴팩처링(Min Guhong Manufacturing)의 몇몇 제품에 관한 사용기, 리뷰, 약간의 부가 정보를 제공한다. 2015년 설립된 민구홍 매뉴팩처링은 자본과 용기 부족으로 설립자가 일하는 다른 근무지에 기생하며 숙주의 부동산과 동산(전용 공간, 컴퓨터, 프린터, 커피 머신 등)을 이용하고 있다. 이 회사의 주 업무는 동업자들과 제품을 제작함으로써 회사 자체, 즉 민구홍 매뉴팩처링을 소개하는 것이기에 이 책은 쉽게 말해 무언가를 소개하고 있다는 사실을 여러 방식으로 소개하고, 동시에 어떤 대상을 소개하는 여러 방식을 제안한다.
책에 실린 밴드 겸 디자인 스튜디오 ‘모임 별’, 시인 송승언, 전 GQ KOREA 피처 에디터이자 사진가인 장우철, 소설가 한유주, 작가 겸 워크룸 편집자 김뉘연, 워크룸 디자이너 김형진, 아카이브 봄 큐레이터 윤율리의 글은 제각각 다른 형식을 띠지만, 결국 오늘날 개인과 기업이 콘텐츠를 생산하고 홍보하는 주된 방식, 즉 어떤 소개로 수렴한다. 이 과정에서 민구홍 매뉴팩처링은 또렷하게 드러나는 대신 오히려 공기처럼 투명해진다.
컨템포러리에 관한 실용적인 지침서
민구홍 매뉴팩처링은 2018년 가을 용산구에 위치한 갤러리 ‘아카이브 봄’에서 회사를 소개하는 전시 레인보 셔벗(윤율리 기획)을 진행했다. 이 책은 행사 또는 박람회 또는 키노트에 가까울지 모를 동명의 전시를 단행본 형식으로 기록하거나 혹은 그 이상으로 확장하는 수단이기도 하다. 따라서 불가피하게 이 책은 전시를 소개하고, 전시가 소개하려는 것을 소개하고, 전시가 소개하려는 것을 통해 회사를 소개하는 회사를 소개할 수밖에 없는 다소 복잡한 구조를 띠게 됐다.
어떤 독자들에게 이 순환논증은 나쁜 말장난처럼 들릴 수도 있다. 그런데 실은 이런 역설이 오늘날 ‘편집’이라는 용어처럼 우리 도처에 존재한다면? 광고, 컨설팅, 셀프 브랜딩, 투자 자문, 디자인, 현대미술, 블로깅, 유튜브 콘텐츠 기획, 건축 공모, 신흥 종교 전도, 시 창작, 매일 길에서 목격하는 다단계의 현장까지, 지나치게 전문화된 현대의 모든 영역에서 이런 불온한 가설을 상상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진실한 내용이란 그들이 자리 잡은 전광판, 브로드캐스팅 시스템, 레이아웃, 템플릿, 플랫폼, 보일러플레이트(boilerplate), 전시장, 제도, 인사말이나 머리말 또는 <head>
와 </head>
사이의 편집적 규율에 있는 것은 아닐까?
누군가 이 고약한 지적 음모에 가담하기로 마음먹는다면, 분명 이 책 레인보 셔벗은 값비싼 MBA 과정보다 훨씬 ‘가성비’ 좋은 지침서가 되어줄 것이다. 혹은 적어도 그런 느낌이 들게 해줄 것이다. 컨템포러리와 무엇보다 컨템포러리라는 비즈니스에 관해.
이 책의 실용적 측면
이 책을 디자인한 슬기와 민은 전시 레인보 셔벗의 디자이너였던 강문식이 발견한 한 인물 사진을 표지에 사용했다. 얼굴 크기가 한국인 평균 크기(정수리부터 턱 밑까지 길이인 23.6센티미터)가 되도록 맞춘 뒤 적당히 잘랐으므로 책을 펼쳐 읽다 보면 일종의 가면이 된다. 따라서 소셜 미디어에 셀피를 찍어 올리기에도 요긴하다. 다양한 방식으로. #레인보셔벗
『레인보 셔벗』은 민구홍 매뉴팩처링이 회사를 소개하기 위해 제작한 가장 물리적인 물건이다. 동시에 가장 비물질적인 회사 소개이기도 하다. 누군가는 이 책을 ‘제품’이라고 부르고, 누군가는 ‘전시 도록’이라 부르고, 누군가는 단순한 농담의 확장이라고 부른다. 그 가운데 어느 것도 틀리지 않다. 다만 이 책을 한마디로 설명할 수 있다면, 어쩌면 그것은 이 책의 실패를 뜻하는 일일지 모른다. 민구홍 매뉴팩처링이 무엇인지 간명하게 정의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레인보 셔벗』은 2015년부터 2019년 사이에 민구홍 매뉴팩처링에서 제작된 몇몇 제품에 관한 사용기, 리뷰, 후기, 약간의 부가 정보를 담고 있다. 제품이라고는 했지만 그것들은 대개 편지, 웹사이트, 전시 포스터, 회의감, 명함이 만들어지지 못한 이유 따위로 구성돼 있다. 자본과 용기의 부족으로 숙주에 기생하는 회사답게, 이 책 또한 아카이브 봄과 작업실유령의 힘을 빌려 세상에 나왔다.
이 책은 요컨대 ‘회사를 소개한다는 행위’를 다양한 방식으로 소개하는 책이다. 소개를 소개하는 책. 그것은 결국 ‘소개’를 단일한 말투나 형식으로 정의하기 어렵다는 뜻이기도 하다. 소개란 무엇인가? 송승언, 장우철, 한유주, 김뉘연, 김형진, 윤율리 등 다양한 동료들이 이 책에 참여해 각자의 방식으로 대답한다. 그들 각자의 문장과 이미지가 서로 다른 방식으로 회사를 떠올리고, 그에 대해 말하고, 말하지 않는다. 이 말과 침묵 사이에서 민구홍 매뉴팩처링은 더 선명해지는 대신 점차 투명해진다. 공기처럼.
하지만 이 책은 단지 인물과 문장을 모은 기념집이 아니다. 회사를 소개하는 전시를 소개하기 위해 제작된 책이, 다시 전시와 책을 통해 회사를 소개하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윤율리가 기획한 전시 『레인보 셔벗』(아카이브 봄, 2018)은 회사 소개 자체를 하나의 전시로 치환한 실험이었고, 이 책은 그 전시를 설명하면서도, 동시에 그 전시가 의도한 방식으로 다시 한 번 회사를 소개한다. 전시를 소개하고, 전시가 소개하려는 방식을 소개하고, 그 모든 소개의 순환을 책의 형식으로 덧붙이는 구조. 말하자면 다단계 같은 책이다. 그 자체로 컨템포러리한 편집 실천이자, 자기소개 산업에 대한 유쾌한 풍문이기도 하다.
이 책은 단지 이론적인 유희에 그치지 않는다. 실용성도 의외로 크다. 슬기와 민이 디자인한 이 책의 표지는, 전시 포스터 디자이너였던 강문식이 발견한 어떤 인물 사진을 바탕으로 제작되었고, 한국인 평균 얼굴 크기에 맞춰 잘라져 있어 책을 펼쳐 들면 자연스럽게 가면처럼 얼굴을 덮는다. 책을 손에 든 독자의 셀피는 자동으로 민구홍 매뉴팩처링을 소개하는 캠페인이 된다. #레인보셔벗 해시태그와 함께. 다시 말해 이 책은 전시장에 놓인 프리젠테이션일 수도, 템플릿일 수도, 어떤 컨설팅 보고서일 수도 있다. 요컨대 오늘날의 브랜딩, 미술, 광고, 편집, 콘텐츠 기획이라는 이름 아래 벌어지는 여러 ‘소개’ 산업에 관한, 말로 된 물건이자 실천적 사례집이다.
어떤 독자에게 이 구조는 지독한 농담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순환 구조는 이미 현대 산업 도처에서 발견된다. ‘소개를 소개하고, 소개의 방식을 소개하는 일’은 오늘날 광고, 블로그, 큐레이션, 유튜브, 아티스트 스테이트먼트, HTML의 <head>
영역, 전시 오프닝 인사말, 정부 보고서의 표지 디자인에 이르기까지 보편적인 실천이다. 『레인보 셔벗』은 그 현상에 뛰어들어 그것을 제품으로, 다시 제품을 책으로, 다시 책을 가면으로, 다시 가면을 텍스트로 되돌린다. 그래서 민구홍 매뉴팩처링에서는 이 책을 더 이상 인쇄하지 않는다. 대신 이렇게 말한다.
“민구홍 매뉴팩처링에서는 『레인보 셔벗』을 재고 정리하지 않습니다.”
이미 출고된 몇 권의 책이 누군가의 책상, 서가, 셀피 안에 존재한다면, 그것이면 충분하다. 어쩌면 이 책은 ‘내용을 이해하기보다 어떤 방식으로든 소유하게 되는 책’일지도 모른다. 즉, 내용보다 태도로 작동하는 책. 그리고 그 태도는 오늘도 민구홍 매뉴팩처링을 다시 소개하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