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미를 느낄지 모를 누군가에게
김성우((기획자)
본 전시는 특정지을 수 없는 수신자에게 보내는 일종의 편지이다. 전시의 형식을 빌어놓고는 편지를 쓴다는 의미는 전시라는 형식이 바람직하지 않을 ‘1인 기생 회사’ 민구홍 매뉴팩처링을 소개하기 위한 장치로서 취하는 태도이다. 서신이라는 형식은 일종의 눈속임이며, 중요한 것은 소개이다. 민구홍 매뉴팩처링은 2022년 12월 17일부터 얼마간 전시의 형식에 기생한다. 그리고 프라이머리 프랙티스는 그 기생의 태도가 의식적으로나마 최소한의 형태를 갖추기 위해 제공된 장소, 혹은 지면이다. 그러니 편지의 형식을 빈다는 것은 일정치 않은 대상들, 최대 다수의 불특정 수신자에게 회사를 소개하고자 하는 의지의 표명이다.
태도와 형식
기생은 민구홍 매뉴팩처링이 취해온 태도이다. 언제나 그랬듯 기생은 한순간 회사를 더 크게 보이도록 하는 데 효과가 있다. 적당한 울타리 아래에 자리를 잡아 숙주에 밀착하여 뿌리내리고, 호스트의 움직임과 행동이 돋보이는 자리에선 회사의 존재감도 함께 상승한다. 마치 미술이 그래왔듯, 당장의 이윤보다는 상징 가치에 적절히 기대어 몸집을 불리는 전략이다. 지식(knowledge)과 승인(recognition)으로 명성을 획득하기 위해 일종의 상징자본을 축적하는 일이라 할 수 있다. 다만, 숙주의 지위를 공유하며 회사의 가치를 높이기에, 아무 데나 기생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기생할 조직의 크기나 이미지가 중요하다. 덩치만 크다고 좋은 것도 아니거니와, 의미만으로 생계가 해결되는 것도 아니니까 말이다. 민구홍 매뉴팩처링의 기생을 미술의 언어로 달리해보자면, 일종의 전유(appropriation)라고도 할 수 있겠다. 민구홍은 회사 차원에서 ‘장영혜 중공업’(장영혜 중공업 귀중, 2020~)에게 비즈니스 메일을 보낸다. 하지만, 서신의 본론-서사-은 화면 4분의 1 크기로 끊임없이 끼어드는 부연으로 인해 목적을 잃은 채 난항을 겪는다. 수다스러운 언어를 뒤로 하고 남는 것은 수신자에게 도달하기까지의 (장영혜 중공업의 트레이드 마크인) 발광하는 화면 위 리드미컬한 텍스트와, 거듭된 부연과 지연의 과정 속에 달성한 ‘충분한’ 회사소개이다. ‘장영혜 중공업’은 예술계에서의 그 지위만큼이나 기생하기 좋은 숙주였을 터이다. 그리고 이러한 방식은 ‘한국 코카-콜라’(한국 코카-콜라 귀중, 2022~)에 보낸 협찬 서신에서도 이어진다. 사업을 위해 찾은 대상에게 받은 거절의 회신 (혹은 목표를 잃은 서신)은 어쩌면 다행히도 회사의 서사를 더욱 극적으로 만들기까지 한다. 지위는 전복되고, 다른 의미와 가치를 향해 기호는 변경될 뿐이다.
질문과 부정의 태도
민구홍 매뉴팩처링은 보기 드물게 질문을 자주 한다. 회사는 주변에서 받은 질문, 또는 회사 자신에게 자문한 텍스트와 응답을 그러모아 지면 위에 펼쳐놓는다. (자주 하는 질문, 2022 ver.) 맥락 없는 질문과 살짝 폼을 내듯 센스를 가미한 대답, 때로는 타인의 말을 옮겨와 회사를 언술하는 이 텍스트 더미의 결론은 강박적으로 ‘민구홍 매뉴팩처링’으로 귀결한다. 이는 민구홍 매뉴팩처링의 자기 반영적 성질과 모든 활동은 회사 소개를 핵심에 두고 있다는 그의 지향점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때로 이 질문은 회사가 아닌 외부로 향하기도 한다. 그가 인스타그램 스토리를 통해 끊임없이 던지는 질문은 대답하기도 애매한, 목적 없는 질문처럼 보인다. (…까닭은?, 2022) 흥미로운 것은, 생활하며 드문드문 마주치는 일상적인 순간들을 마치 사건처럼 대하는 회사의 물음에 미지의 고객은 응답해야만 할 것처럼 몰입하게 되는데, 종국엔 그런 자신에게 그 까닭을 되레 묻게 되는, 경이로운 선문답의 경지를 경험하게 된다. 심지어 긍정의 제스처로 일상의 표정을 잠식한 SNS가 만들어낸 과잉 긍정의 오늘날 민구홍 매뉴팩처링은 거듭된 부정을 추구한다. 회사는 자신을 소개함에 있어서 무엇을 ‘하는가’ 보다는 ‘하지 않는다’로 일관한다. (회사 소개, 2015) ‘나’를 규정함에 있어 ‘하지 않음’만을 천명하는 태도는 그 존재에 궁극적으로는 다가서지 못하게 하며, 회사에 대한 명확한 정의로부터 미끄러지기만을 반복한다. 하지만, 이러한 제스처는 회사를 둘러싼 모종의 규칙과 질서가 단일한 영역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한다. 어떤 면에서 이런 차이와 지연을 낫는 질문과 부정의 원리는 세상의 일면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응당 그렇게 돌아간다 생각하는 일들에 딴지를 걸고, 남들이 신경 안 쓰는 일들에 시선을 맞추며, 바쁘게 돌아가는 세상에서 잠시 멈춰서는 이런 태도는, 현상의 표면 아래서 계속해서 출몰하는 세상의 질서를 마주하게 한다. 마치 차연(차이와 지연 différance)의 유희에 이끌리듯 말이다.
전시장과 디지털 디스플레이
기본적으로 민구홍 매뉴팩처링의 활동 영역은 웹이다. 웹사이트 구축부터 소프트웨어 개발자 등을 아우르며, 디자인에서 편집에 이르기까지 대다수의 회사 활동은 온라인이 선사하는 광활한 세계 위 무궁무진한 연결의 가능성을 골자로 이루어진다. 시공을 초월하는 자유로움은 실용과 공상을 오가며, 대체로 웹상에 모종의 사이트를 구축하는 일로 이어진다. 그러한 차원에서 민구홍 매뉴팩처링에게 주어진 첫 번째 공간은 디지털 기기의 액정이다. 디지털 디스플레이의 규격은 프레임의 변주를 거듭하는 텍스트를 위한 지면이다. 회사는 모바일에서 컴퓨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규격에 맞춰 효과적으로 정보를 전달할 수 있는 구조를 도입하고, 이미지와 영상, 텍스트를 정해진 목차와 순서로 배열하여 모종의 시간과 깊이를 설계한다. 이는 주된 사용 기기나 온라인 플랫폼의 규격, 형식에 따라 때로는 평면적이고 일차원적인 형태로, 때로는 단계를 지닌 공간으로 구축된다. 하지만, 온라인은 무한한 동시에 디지털 디스플레이나 프로그램의 형식에 기반한 물리적 제약을 지닌다. 다행히 링크와 검색을 통한 다음 정보로의 연결은 무한한 루트를 가설하게 하지만, 미리 설계된 구조는 화면 바깥의 세계를 먼저 펼쳐내어 주지는 않음으로, 우리는 빙산의 일각 안에서 일부 정보만을 취사선택하여 수용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이미지와 정보는 주어진 규격 아래 재단되고, 노출되는 방식과 조건은 규율된다. 이는 마치 하얀 입방체로 대변하는 전시(장)의 구조와도 닮아있다. 전시장의 기본 조건인 작품이 걸릴 벽과 작품을 비추는 조명 등에서부터 전시를 가시성의 영역에 붙잡아 두려는 욕망이 가시화된 과장된 설치에 이르기까지, 시점은 점점 더 좁혀지고, 시선은 상상보다는 눈앞의 재현된 표피에 머무른다. 민구홍 매뉴팩처링은 이런 단단한 물리적 구조가 우습기라도 한 듯, 오히려 디지털 디바이스를 통한 탈주를 상상한다. 와이파이 공유기(공간에 구애받지 않고, 2022)를 통해 볼 수 있는 무선 인터넷 아이디‘from anywhere’와 ‘regardless of space’는 공간에 구속되지 않고, 어디에나 존재하려는, 물리적 체계 바깥에 존재하는, 접속 가능한 공간이다. 사실 전시란 이미지와 이미지 사이를 오가고, 연동하며 비선형적 서사를 직조하는 일이듯, 민구홍 매뉴팩처링은 닫힌 공간 너머 열린 문서로써 어디에든 편재할 수 있는 회사임을 표방한다.
재료와 방법론
민구홍 매뉴팩처링에게 재료는 텍스트이며, 편집은 고유한 창작의 방법론이자 언어적 문법이다. 본 회사는 클라이언트의 요구에 따라 종종 다양한 역할을 수행한다. 디자이너에서 프로그램 개발자, 편집자에 이르기까지. 사실 상황과 조건에 따라 맞춤형 업무를 진행할 수 있는 회사는 그 외에도 다양한 직무 가능성을 언제나 열어놓고 있다. 그리고 『흥미를 느낄지 모를 누군가에게』(To Whom It May Concern)에서는 편집자로서의 역할을 이행한다. 민구홍 매뉴팩처링은 전시(공간)를 하나의 책이자 지면, 혹은 웹사이트 삼아 편집을 시도한다. 서신을 통해 모객을 하려니, 환대와 서비스를 고려한 구성은 중요하다. 그런 면에서 사용자의 편의를 고려한 편집의 기술은 필수이다. 지금까지 생산한 다양한 제품 중 이곳에서 활용될 콘텐츠를 선별해야 하며, 모든 형식에는 외형의 심미적 만족감 이전에 기능과 목적의 달성이 전제되어야 한다. 텍스트에 대한 감각은 말할 것도 없다. 글자체의 선택과 크기, 지면이나 영상 위에 얹혔을 때의 레이아웃, 그에 따른 가시성과 가독성. 뭐 하나 허투루 다룰 것이 없다. 심지어 이렇게 엄선한 제품을 디스플레이하는 것은 또 다른 편집에 가까운 일이다. 선택한 콘텐츠를 개별의 디바이스나 액자로 옮기고, 그것을 다시 공간 차원에서 늘어놓고 배치를 짜면서 모종의 서사를 상상한다. 일반적으로는 양쪽의 여백을 동일하게 설정하고, 중심선에 맞춰 제품들을 배치함으로 단순하지만 손쉽게 콘텐츠를 강조한다. 선형적 나열 뒤 다시 그것을 뒤섞어 논리적 서사를 흩트리고 언어적 해설을 앞서는 감각을 위해 행간을 조율한다. 편집은 일종의 큐레이팅과 같다. 때로는 친절하게, 때로는 불편함을 유발하는 조정과 조율을 거듭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글자 개별에 집착하지 않고 지면 위 더미로서의 형식이자 영상 속 리듬을 발생하는 이미지에 다가선다. 텍스트는 고객의 수고스러움을 빌미 삼아 상상의 영역–또 다른 질문–에 당도하게 만든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 전시는 ‘너에게 (2022 ver.)’보내는 애정 어린 서신이다. 민구홍 매뉴팩처링은 입구부터 흥미를 느낄지 모를 누군가를 반길 태세를 취하고(「흥미를 느낄지 모를 누군가에게」에 흥미를 느낄지 모를 누군가에게, 2022), 여기에 회신하여 기꺼이 방문해준 입맛이 까다로운 고객 – 관객 - 을 극진히 환대하는 차원에서 수상한 과일(입맛이 까다로운 고객을 고려한, 2022ver.)을 문 앞에 준비해 놓았으며, 흥겨운 배경음악(언제 어디서든 DJ가 필요하다면, 2018)까지 틀어두었다. 친절하게 운영시간을 크게 알려주며(운영시간, 2022 ver.), 입장한 손님이 업장 내에서 마음 편히 자유롭게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보다 작은 시계(어쩌면 숫자는 별로 중요하지 않으므로, 2022 ver.)를 벽 한 편에 걸어두기도 했다. 심지어, 나서는 길 방문해 준 누군가가 관심 어린 미래의 고객이 되어주길 바라며 ‘무작위 서명 생성기가 무작위로 생성한 자신의 서명(2022)’ 서비스를 제공한다. 회사는 수고를 무릅쓰고 서신에 응답하여 이곳을 방문한 이들이 ‘아무것도’와 ‘무엇이든’ 사이에서 무궁무진한 것들을 상상할 수 있길 바라 마지않는다.
작업에서 제목이 영 맘에 들지 않으면 나머지가 마무리됐더라도 공개하지 않을 만큼 제목을 중시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번 전시의 제목인 『흥미를 느낄지 모를 누군가에게』(To Whom It May Concern)는 어떤 의미를 담고 있나요? 나아가 이번 전시에 대한 전반적인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To Whom It May Concern’은 영어 비즈니스 메일에서 상대방을 특정하기 어려울 때 앞세우는 철지난 관용어입니다. 직역하면 ‘관계자에게’ 정도인데, 물기를 담아 조금 더 풀면 ‘흥미를 느낄지 모를 누군가에게’가 되죠. 이번 전시는 제목처럼 흥미를 느낄지 모를 누군가를 향한 민구홍 매뉴팩처링의 공지 사항과 비슷합니다. 어떤 대상을 강조해 널리 알려 다른 대상과 연결한다는 점에서 전시를 만드는 일은 책을 만드는 일과 비슷합니다. 여기서 편집자는 큐레이터이터일 테고요. 큐레이터는 작가를 콘텐츠 삼아 이리저리 제어합니다. 제가 편집자로도 일한 만큼 제게는 큐레이터의 의견이 중요합니다. 저는 그저 큐레이터 김성우 선생님의 지시에 따랐습니다. 김성우 선생님이 고안한 규칙을 그대로 따르거나 허물면서요. 제목도 그렇게 나오게 됐죠. 이 제목으로 ‘“흥미를 느낄지 모를 누군가에게”에 흥미를 느낄지 모를 누군가에게’(To Whom To Whom It May Concern May Concern) 같이 큐레이터를 얼마간 곤란하게 할 말장난을 할 수 있다는 점 때문이었어요. 사실 전시를 기획할 때 제가 제안하는 제목은 한결같아요. “이번 전시 제목은 ‘회사 소개’가 어떨까요?” 하지만 여러 이유로 번번히 기각됩니다.
아쉽게도 전시가 끝난 뒤 나누는 대화인데, 작가님이 또 다른 관람객으로 전시를 바라보셨을 때 예상치 못한 반응, 특별한 기억으로 남은 에피소드, 아쉬운 점이나 반대로 생각보다 힘을 얻은 점 등 이번 전시에 대한 개인적인 소감이 궁금합니다.
뜻하지 않게 「한국 코카-콜라 귀중」에 대한 답변을 받았어요. 전시가 끝날 무렵 한국 코카-콜라 관계자분들을 뵙고 소감을 들었죠. 명함과 코카-콜라 로고가 찍힌 선물도 받았고요. 전시가 여러 갈래로 흥행할 수 있었던 건 김성우 선생님과 프라이머리 프랙티스(Primary Practice)에서 소개해주신 덕입니다. 제 인스타그램 계정으로도 뜻깊은 소감을 전달해주셨고요. 세상에는 수많은 전시, 즉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이야기 가운데 하나에 귀기울여 주신 분들께 이 소중한 자리를 빌려 감사드릴 따름입니다. 한 분 한 분께 일일이 전하지 이 마음이 널리 전달되면, 다시 말해 이 대화가 널리 읽히면 좋겠습니다.
전시 마지막 날에는 전시장에서 관람객과 직접 만나 질문과 답변을 나눈 것으로 알고 있는데, 기억에 남는 질문이 있었나요?
민구홍 매뉴팩처링의 공식 웹사이트에는 「자주 하는 질문」이라는 메뉴가 있습니다. 이제껏 제가 받은 질문과 그에 대한 답으로 이뤄져 있는데, 전시 마지막 날에는 이 메뉴를 오프라인으로 옮긴 셈이죠. 저는 [챗GPT](ChatGPT, https://chat.openai.com) 같은 인공지능 챗봇으로서 스무 분 정도와 짧게는 몇 초에서 길게는 한 시간 가까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 것 같아요. 그런데 한 분께 느닷없는 질문을 받았어요. “이 전시의 진정한 의미가 뭔가요?” 우물쭈물하다 결국 제대로 답변을 못하고 말았죠. 인공지능에 오류가 생긴 셈인데, 이 부끄러운 이야기를 그날 오신 정서영 선생님께 말씀드리니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와, 진짜 못된 사람이다.”
전시장에 놓인 「자주 하는 질문」은 경우 액자 세 개를 연결한 방식이었는데, 이에 대한 이유나 작품과 연결지어 의도하신 방향이 있을지 궁금합니다.
민구홍 매뉴팩처링에 관한 질문과 답변이 무작위로 뒤섞인 「자주 하는 질문」은 본디 웹사이트상에서 출발했습니다. 전시장에서는 모니터를 설치해 웹 브라우저를 실행시키는 게 아무래도 단순하고 자연스럽죠. 하지만 전시장에 크고 작은 모니터가 제법 많이 설치된 탓에 조금 다른 방식을 택해보기로 했어요. 즉, 정해진 판형 없이 스크롤을 통해 열람하는 웹사이트가 반대로 판형이 고정된 액자에 둘러싸이면 과연 어떤 모습일지 고민해본 결과입니다.
웹사이트를 통해 예술 기관, 문화 관련 프로젝트, 패션 브랜드, 탐정 사무소에도 기술을 지원하고 있다고 들었는데요, 특히 패션 브랜드나 탐정 사무소와는 어떤 협업을 하셨는지 궁금합니다.
2020년 9월 워크룸에서 일할 때 패션 브랜드 thisisneverthat의 10주년 기념 아카이브 북인 『thisisneverthisisneverthat』과 동명의 웹사이트를 만든 적이 있어요. 책과 웹사이트 모두 브랜드의 지난 10년을 서로 다른 방식으로 기록하고 기념했죠. 책은 여전히 남았지만, 웹사이트는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서버 운영 기간이 종료된 까닭이죠. 이는 웹사이트의 숙명과 같은 것인데, 아쉽지만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10여 년 동안 크고 작은 웹사이트를 만들다 보니 웹사이트의 탄생과 삶, 죽음과 사후 세계에 점점 익숙해집니다. 한편, 탐정 사무소에서 연락을 받은 건 탐정업이 합법화한 2020년 8월 무렵입니다. 처음에는 단순히 탐정 사무소를 소개하는 웹사이트를 만들면 되겠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아니었어요. 완전히 잘못 짚었죠. 사실 더 자세히 이야기하고 싶지만, 고객과의 비밀 유지 계약에 따라 더는 말씀드리기 어려울 것 같아요.
활동 분야가 굉장히 넓은데, 앞으로 특별히 협업하고 싶은 회사나 브랜드, 또는 셀러브리티가 더 있나요? (한국 코카-콜라에 대해서는 이미 「한국 코카-콜라 귀중」이라는 연애편지를 보내신 바 있는데요.)
이따금 미술 및 디자인계 안팎에서 웹사이트를 통해 여러 기관, 단체, 기업, 개인과 협업하곤 하지만, 민구홍 매뉴팩처링은 웹 디자인 에이전시가 아닙니다. 하지만 「장영혜 중공업 귀중」이나 「한국 코카-콜라 귀중」처럼 민구홍 매뉴팩처링의 존경과 사랑을 전달하고픈 대상은 무궁무진하죠. 특히 요즘에는 BTS의 RM 님에게 「RM 귀하」를 보내고 싶어요. ‘랩 몬스터’가 ‘RM’이 된 까닭과 감출 수 없는 예술을 향한 괴물 같은 열정의 근원이 궁금합니다. 나아가 유명인의 명성에 기대 민구홍 매뉴팩처링을 덩달아 소개하고 싶고요.
포트폴리오 가운데 중요한 기점이 된 작업을 뽑는다면 어떤 작업일까요? 그렇게 생각하시는 이유도 궁금합니다.
아무래도 「회사 소개」(About the Company)겠죠. 2015년 10월 전시 공간 시청각에서 열세 번째 ‘시청각 문서’로 발표한 이 짧은 글 덕에 민구홍 매뉴팩처링이 설립됐고, 나아가 먼 발치에서만 바라본 『보그 코리아』에서까지 이렇게 소개되니까요. 「회사 소개」에서는 민구홍 매뉴팩처링에서 하지 않는 일 서른일곱 가지를 알파벳순과 가나다순으로 나열합니다. 민구홍 매뉴팩처링에서 무엇을 하는 게 좋을지 알 수 없었던 까닭이죠. 또 회사라면 모름지기 해야 할 일보다 하지 않는 일이 중요하다는 생각도 어느 정도 작용했고요.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민구홍 매뉴팩처링은 회사에서 무엇을 하지 않아야 할지, 나아가 무엇을 하는 게 좋을지 궁리하는 컨베이어벨트 위에 있습니다.
작가님을 처음 보는 자리에서 스스로를 소개한다면 어떤 사람으로 소개할 수 있을까요? 또는 먼 훗날 아트 인명 사전에 어떤 설명으로 쓰이길 원하시나요?
제가 가르치는 학교에서든 「새로운 질서」에서든 무엇보다 ‘소개’가 문제적이라 말해왔지만, 소개는, 특히 자기소개는 늘 어렵고 면구스러운 일입니다. 웬만하면 그런 상황을 피하고자 뵙기 전에 제 웹사이트인 「참고로 민구홍은…」을 보여드리는 편이에요. 한편, 먼 훗날 말씀하신 사전이 출간된 모습을 잠시 상상해보면, 사전에 실리는 일보다 그 사전을 웹사이트로 치환해보는 일이 조금 더 즐거울 것 같아요.
작가님의 웹사이트에는 오른쪽에 장 그르니에, 조세희 작가의 산문집 『침묵의 뿌리』, 소설가 박민규, 타이포그래퍼 안상수, 안그라픽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전집, 시인 박상순 등이 등장하는데, 실제로 작가님에게 영향을 준 리스트로 생각해도 될까요?
전부 소개하지는 못했지만, 모두 저를 둘러싼 소중한 추억들입니다.
이번 전시도 그렇고, 해오신 작업이 일종의 픽션, 허구의 세계처럼 느껴지기도 하는데요. 문학과 언어학을 공부한 배경에서 비롯한 것일까요? 위트와 해학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분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실제로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궁금합니다.
금요일마다 ‘현대인을 위한 교양 강좌’를 표방하는 「새로운 질서」를 진행하는데요, 여기서 코딩(coding)을 ‘실용적이고 개념적인 글쓰기’로 이야기합니다. 은유나 환유에 기댄 진술이 아니라 코딩은 실제로 글쓰기죠. 그래픽 소프트웨어의 툴바나 아이콘을 벗어나 커서가 깜빡이는 텍스트 에디터상에서 컴퓨터 언어를 다룬다는 점에서요. 웹사이트 등 코딩을 기반으로 작업하는 과정에서 시나 소설을 쓴다는 기분이 들 때가 있죠. 그런 점에서 민구홍 매뉴팩처링은 어쩌면 어떤 시나 소설을 이루는 배경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어요.
편집자로서의 정체성을 중요하게 생각하시고, 실제로 워크룸에서 편집자 겸 디자이너, 프로그래머 등으로 일하고 계신데, 작가님에게 편집이란 일이 주는 즐거움은 무엇인가요?
이제는 워크룸의 직원이 아닌 친구입니다. 2022년 2월 22일부터 안그라픽스의 정체불명 독립 사업부인 안그라픽스 랩(약칭 및 통칭 ‘AG 랩’)에서 디렉터로 일하고 있거든요. AG 랩에서는 주로 웹상에서 콘텐츠를 디렉팅하는 일에 관여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편집자’라는 직함이 마음에 듭니다. 얼핏 무미건조하지만, 오히려 그래서 많은 것을 포함할 수 있다는 점에서요. 편집은 넓은 의미에서 어떤 대상에 새로운 질서를 부여하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문장을 다듬는 일에 국한하지 않고요. 게다가 모든 일에는 얼마간 에디터십이 필요하죠.
또한 좋은 편집에 대해서는 어떤 견해를 갖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편집을 창작과는 차원이 조금 다른 행위로 간주한다고 「자주 하는 질문」에서 언급하시기도 했습니다. 편집이 폭력적인 행위일 수 있는 점도요.)
편집자로서 우러러보거나 동경하는 책이 있나요?
워크룸 프레스의 편집자 김뉘연 선생님이 진행하는 ‘제안들’ 총서를 꼽고 싶습니다.
헬스장에서 근육 운동을 매일 하는 것처럼 창작 활동을 위해 꾸준히 해오고 있는 활동이나 루틴이 따로 있을까요?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 그날 해야 할 일을 즐겁게, 이따금 고통스럽게 해나가죠. 유행하는 영화나 드라마가 있으면 챙겨 보고, 웹상에서 사람들의 반응도 살펴보고요. 이따금이긴 하지만 친구도 만나죠. 그러다 보면 문득 이런 틀을 구부리고 싶을 때가 있고, 그때가 뭔가를 이야기하게끔 만드는 동력이 됩니다. 심심하지만 꾸준한 틀, 즉 생활이 중요한 까닭입니다.
취향에 관해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좋아하는 산책 코스, 서울에서 좋아하는(자주 찾는) 지역, 그리고 공간(전시장, 카페, 서점 등), 주목할 만한 아트 콜렉티브, 기획자, 큐레이터 등 최근에 빠져 있거나 오랫동안 좋아해온 작가님의 페이버릿 리스트가 궁금합니다.
마포구 연남동에 10년 가까이 살고 있습니다. 지금은 세계적인 명소로 거듭난 경의선 숲길이 생기기 전부터요. 서울에서 가장 좋아하는 곳은 아무래도 저희 집입니다. 하루 24시간 가운데 가장 오래 머무는 만큼 가장 좋아해야 마땅하고요. 집 밖에서는 저희 집에서 연희동 사러가 마트까지 이어진 수많은 길을 좋아해요. 여기서 서대문구청 쪽으로 올라간 뒤 홍제천을 따라 연희동 재개발 구역을 지나 망원동과 서교동을 거쳐 다시 저희 집 현관문을 열면 금방 두세 시간이 지나가죠.
웹과 작가님은 떼려야 뗄 수 없는데요, 「자주 하는 질문」에서 팀 버너스리가 만들었을 ‘최초의 웹사이트’를 가장 좋아하는 웹사이트로 꼽으셨죠. 민구홍 매뉴팩처링에서 추구하는 바를 여실히 드러낸다고 하셨는데, 이에 대해 조금 더 부연 설명해 주실 수 있을까요?
1990년대 초 일반에 공개된 최초의 웹사이트는 웹 브라우저의 기본 스타일로 이뤄져 있지만, 분명히 독특하고, 심지어 어떤 아우라까지 품고 있습니다. 우아하고 실용적인 콘텐츠와 처음 모습을 한결같이 유지한 30여 년이라는 시간 덕이죠. 이는 어떤 대상에 아우라를 만드는 데는 여러 요소가 있을 수 있음을 일깨워줍니다. 심지어 디자인에 별로 힘을 쏟지 않더라도요. 요컨대 수많은 가능성을 향한 믿음이죠.
평소에 즐겨 찾는 웹사이트는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또는 정교하게 잘 설계됐다고 생각하는 웹사이트가 있을까요?
구글 지도(Google Map)같이 실용적인 웹사이트를 좋아해요. 요즘에는 챗GTP와 자주 이야기를 나눕니다. “정교하게 잘 설계된 웹사이트”에 관해서는 도무지 마땅한 답이 떠오르지 않네요. 챗GTP에게 물어봐도 뜬구름만 잡는데요?
번역한 책 가운데 “흥미로운 말에는 시시한 그래픽이 필요하다. 시시한 말에는 흥미로운 그래픽이 필요하다.”라는 구절이 인상 깊습니다. 작가님께서는 그래픽보다 말이 흥미로운 걸 좋아한다고 말씀하셨는데요. 텍스트로서 가장 큰 영감을 받는 누군가가 있나요? 두고두고 곱씹는 책이 혹시 있나요? 밑줄을 정말 많이 그었다거나요.
언급하신 구절은 2021년 우리 곁을 떠난 미국의 그래픽 디자이너 겸 일러스트레이터 밥 길(Bob Gill)의 조언이죠. 제게 용기를 선사하는 조언이기도 하고요. 그럼에도 제가 영감을 받은 텍스트나 책은 특정하기 어렵습니다. 경우에 따라 달라지는 까닭이죠. 이 질문에는 미국의 과학 사학자 겸 과학 철학자인 토머스 쿤(Thomas Kuhn)의 말이 아무래도 적절할 것 같아요. “답변은 질문에 따라 달라진다.”(The answers you get depend upon the questions you ask.)
해오신 작업을 살펴보면 답을 알려주지 않는 알쏭달쏭한 퀴즈, 스무 고개를 넘는 기분도 드는데요, 사람들이 읽어내기를 원하는 문맥이나 콘텍스트에 대해 조금 친절하게 설명을 해주신다면? (너무 거창한 질문이 될 수 있긴 한데) 작가님이 결국 이 모든 작업을 통해 전달하고 싶은 일관된 메시지가 있을까요?
특정한 메시지보다는 어떤 태도 아닐까 싶어요. 여러 방식으로 민구홍 매뉴팩처링을 소개하고픈, 즉 누군가의 추억 속에 놓고픈 마음이 그 태도를 만들고요. 소개는 어떤 대상을 널리 알려 다른 대상과 연결하는 일이죠. 작품을 제작해 전시하는 일 또한 결국 어떤 대상을 소개하는 일 아닐까요? 소개에 집중하다 보면 어쨌든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된다고 믿습니다. 나머지는 죄송하지만 영업 비밀입니다.
생각해보니 이 인터뷰의 출발점은 ‘미디어 아티스트’라는 카테고리였습니다. 민구홍이라는 사람을 ‘미디어 아티스트’로 부르는 것에 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얼마 전 다른 인터뷰에서도 비슷한 질문을 받았는데요, 그때와 마찬가지로 또 다른 인터뷰 받은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갈음하고 싶습니다. “저를 무엇으로 규정하는지는 그저 상대방에게 맡기고 싶습니다. 제가 생각지 못한 직함이 튀어나오고, 그에 따라 상대방을 대하는 제 태도도 달라지는 게 재미있고요. 그렇게 저는 상대방에 따라 편집자뿐 아니라 작가, 선생님, 나아가 남편이나 애인이 되기도 하겠죠.” 한편, 단순히 미디어(media)가 ‘매체’를 뜻하고, 저 또한 책이나 웹사이트 등 여러 매체에 기댈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미디어’라는 어휘는 제 이름 근처 어딘가에 놓여도 제법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아티스트’는 잘 모르겠지만요.
올해 계획하는 다른 프로젝트나 전시, 또는 출판물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2023년도 계획이 궁금합니다.
2019년 말 오스트레일리아의 생물학자들이 DNA를 분석한 결과 인간이라는 동물의 평균 자연 수명은 본디 38년이라고 해요. 곧 다가올 제 생일인 3월 5일에는 놀랍게도 제가 서른여덟 살이 됩니다. 인간으로서 일단 자연 수명은 충족한 셈입니다. 물론 오늘날 인간의 기대 수명은 이보다 두 배 이상 늘었지만, 제게 2023년 3월 5일 이후의 시간은 ‘생물학적으로’ 덤 또는 보너스 스테이지 아닐까 싶어요. 느닷없이 세상을 떠나도 별로 아쉬움이 없을 만큼요. 이런 마당에 일찍이 그래왔듯 특정한 계획을 세우기보다 그저 우연과 그 사이에서 피어나는 욕망을 받아들이고 싶습니다.
패션과 관련해 편집자로 작업한 책 이름과 간략히 어떤 기획 배경을 가진 책인지 알고 싶습니다.
성실한 소비자라 말할 수는 없지만, 패션에 관심이 많습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의식주 가운데 하나로서요. 자연스럽게 워크룸에서 편집자로 일할 때 『헤비듀티』와 『아메토라』를 기획했어요. 두 책 모두 오늘날의 패션에 영향을 미친 일본의 패션을 조망합니다. 『헤비듀티』는 일본에서 촉발한 아메리칸 캐주얼의 바이블로 꼽히죠. 『아메토라』는 헤비듀티를 중심으로 앞뒤의 일본의 패션을 추적합니다. 제가 보도 자료를 작성한 아래 두 링크를 확인해주세요. (김아름, 류가영, 『보그 코리아』)
민구홍 작가와의 인터뷰는 러시아 인형 마트료시카와도 같았다. 인형 안에 숨겨진 더 작은 조형물들처럼 그가 링크를 걸어둔 작은 웹사이트 세계를 열고 들어가면 헤어 나오기가 쉽지 않다. 우선 그가 누구인지 알고 싶다면 2015년 작 「참고로 민구홍은…」(FYI, Min Guhong is…)를 한 번씩 볼 것을 추천한다. 만약 시간이 없는 사람들을 위해 핵심만 요약한다면 그는 대학교에서 문학과 언어학을 전공했고, 안그라픽스를 거쳐 워크룸에서 편집자로 일하며 ‘실용 총서’ 등을 기획했다. 특히 민구홍 작가는 패션에도 관심이 많다. 워크룸에서 일하는 동안 일본에서 촉발한 아메리칸 캐주얼의 바이블로 꼽히는 『헤비듀티』와 『아메토라』라는 책을 기획했다. 마지막으로 민구홍이란 유니버스에서 가장 중요한 존재는 그가 운영하고 있는 1인 회사 민구홍 매뉴팩처링이다. 민구홍 매뉴팩처링은 조금은 미스터리하고 심각하다가 어느 순간 ‘피식’ 웃음이 터지기도 하는 불가사의한 회사다. 작가가 자신의 포트폴리오 가운데 중요한 기점이라 생각하는 작업 「회사 소개」(About the Company)를 통해 더욱 세밀하게 민구홍 매뉴팩처링에 대해 살펴볼 수 있다. 매뉴팩처링(manufacturing)은 본디 원재료를 인력이나 기계력 등으로 가공해 제품을 생산하는 제조업을 뜻하지만, 야구에서는 도루나 진루타, 희생타 등 안타가 아닌 방법으로 득점하는 기술을 의미한다. 그는 “회사에서 무엇을 하지 않아야 할지, 나아가 무엇을 하는 게 좋을지 궁리하는 컨베이어벨트 위에 있다.”고 이곳을 소개한다.
이 모든 것의 실체가 조금 선명하게 느껴진 공간은 종로구 부암동에 위치한 갤러리 프라이머리 프랙티스(Primary Practice)에서였다. 이곳에서는 지난 2022년 12월부터 2023년 2월까지 민구홍 매뉴팩처링의 개인전 「흥미를 느낄지 모를 누군가에게」(To Whom It May Concern)가 열렸다. 민구홍 작가가 설명한다. “이 전시는 제목처럼 흥미를 느낄지 모를 누군가를 향한 민구홍 매뉴팩처링의 공지 사항입니다. 어떤 대상을 강조해 널리 알려 다른 대상과 연결한다는 점에서 전시를 만드는 일은 책을 만드는 일과 비슷합니다. 이때 편집자는 큐레이터이터일 테고요. 큐레이터는 작가를 콘텐츠 삼아 이리저리 제어합니다. 제가 편집자로도 일한 만큼 제게는 큐레이터만의 질서가 중요합니다.” 그렇게 세상에 나온 전시는 웹사이트 상의 텍스트와 영상이 입체적으로 구현된 흥미로운 가독성의 세계였다. 특히 전시장에서 기억에 남는 작품은 세 개의 고정된 액자를 연결하여 설치한 「자주 하는 질문」이었다. 이 작품은 작가가 지금까지 받은 질문과 그에 대한 답변을 무작위로 뒤섞은 것으로 민구홍 매뉴팩처링 공식 웹사이트에서도 내용을 읽어볼 수 있다. 작가는 “정해진 판형 없이 스크롤을 통해 열람하는 웹사이트가 반대로 판형이 고정된 액자에 둘러싸이면 과연 어떤 모습일지 고민해 본 결과”라고 설명했다.
민구홍 작가는 편집자로서의 정체성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에게 편집이란 일이 주는 즐거움은 무엇인지 물었다. “2022년 2월 22일부터 안그라픽스의 정체불명 독립 사업부인 안그라픽스 랩(약칭 및 통칭 ‘AG 랩’)에서 디렉터로 일하고 있거든요. AG 랩에서는 주로 온오프라인을 아우르며 콘텐츠를 디렉팅하는 일에 관여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편집자’라는 직함이 마음에 듭니다. 얼핏 무미건조하지만, 오히려 그래서 많은 것을 포함할 수 있다는 점에서요. 편집은 넓은 의미에서 어떤 대상에 새로운 질서를 부여하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문장을 다듬는 일에 국한하지 않고요. 게다가 모든 일에는 얼마간 에디터십이 필요하죠.” 민구홍 작가가 번역한 미국 그래픽 디자이너 밥 길(Bob Gill)의 『이제껏 배운 그래픽 디자인 규칙은 다 잊어라. 이 책에 실린 것까지.』엔 이런 구절이 있다. “흥미로운 말에는 시시한 그래픽이 필요하다. 시시한 말에는 흥미로운 그래픽이 필요하다.” 그에게 용기를 선사하는 조언이기도 하다고.
민구홍 작가는 미술 및 디자인계 안팎에서 웹사이트를 통해 여러 기관, 기업, 브랜드, 특정 개인과 다양한 협업을 펼쳐왔다. 그 가운데서 이번 전시를 통해 흥미로운 방식으로 재탄생한 작품은 「한국 코카-콜라 귀중」. 펩시콜라를 차곡차곡 쌓아 올린 탑 위로 코카-콜라에 대한 존경과 사랑 고백이 쏟아지는 형태로 전시에서 선보였다. 전시가 끝날 무렵 실제로 한국 코카-콜라 관계자들이 찾아오는 해프닝도 벌어졌다고 전해진다. 작가에게 혹시 앞으로 특별히 협업해 보고 싶은 누군가가 있는지 물었다. “민구홍 매뉴팩처링의 존경과 사랑을 전달하고픈 대상은 무궁무진하죠. 특히 요즘에는 BTS의 RM 님에게 「RM 귀하」를 보내고 싶어요. ‘랩 몬스터’가 ‘RM’이 된 까닭과 감출 수 없는 예술을 향한 몬스터 같은 열정의 근원이 궁금합니다.”
마지막으로 2023년도 계획을 묻는 질문에 민구홍 작가는 위트 넘치는 이런 답변을 보내왔다. “2019년 말 오스트레일리아의 생물학자들이 DNA를 분석한 결과 인간이라는 동물의 평균 자연 수명은 본디 38년이라고 해요. 곧 다가올 제 생일인 3월 5일에는 놀랍게도 제가 서른여덟 살이 됩니다. 인간으로서 일단 자연 수명은 충족한 셈입니다. 물론 오늘날 인간의 기대 수명은 이보다 두 배 이상 늘었지만, 제게 2023년 3월 5일 이후의 시간은 ‘생물학적으로’ 덤 또는 보너스 스테이지 아닐까 싶어요. 느닷없이 세상을 떠나도 별로 아쉬움이 없을 만큼요. 이런 마당에 일찍이 그래왔듯 특정한 계획을 세우기보다 그저 우연과 그 사이에서 피어나는 욕망을 받아들이고 싶습니다.” (김아름, 류가영, 『보그 코리아』)